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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국민은 볼 수 없는 통일설계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남북 정상회담의 충격이 20여일째 계속된다. 백발 이산가족들의 서러운 상봉이 곧 국민들 심금을 흔들 참이다.

끊긴 지 50년 된 경의선(京義線)도 복원된다고 한다. 또다른 큰 뉴스들도 줄이을 것이다. "모든 게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진척되고 있다" 는 게 당국자의 말이다.

2000년 6월 '김정일 쇼크' 로 시작된 국민들의 감성적 파랑(波浪)은 그래서 앞으로도 쉬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관심이 큰 건 한반도 사정과 긴밀한 바깥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회담 이후 한국에 집중된 미국.일본 등의 공식 외교채널 뒤편엔 비공식 정보라인도 총동원됐다.

남북이 교감한 속내, 자기들의 한반도 정책에 변수가 생겼는지 여부,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무대에 데뷔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서다.

1995년 "25년간 한순간도 붓을 놓지 않고 그려왔다" 며 내놓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통일화(統一畵)' 는 5년 뒤 이렇듯 바람을 몰며 모습을 나타냈다. '3단계 통일론' 이다.

이 통일론이 그해 아태평화재단에서 완성돼 출간될 때 그는 이를 '통일설계도' 라고 표현했다. "도면에 따라 길을 닦고 아스팔트 깔고 가로등 달고 가로수도 심겠다" 고 했고 "산을 만나면 굴을 뚫고 강을 만나면 다리를 놓고 힘들면 잠시 쉬었다 가겠노라" 고도 했다.

그리고 2년반 뒤 그는 집권했고, 또 2년반이 지났다.

들여다보면 지금 남북이 취하는 보조는 바로 그 도면대로 가고 있음이 발견된다. 과거 용공(容共)으로 몰리고 탄압받던 야당지도자의 통일론이 국가의 통일틀이 된 것이다.

그러나 집권 후 金대통령은 자신의 통일론을 선전하지 않았다. 대신 햇볕정책으로 그 성능을 실험했다. 통일당국은 그 이유를 "떠들썩한 통일방안 제시보다 통일 여건을 만드는 게 중요했기 때문" 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정부의 침묵은 한편으로 국민들을 통일정책에 무지(無知)하게 만들었다. 6.15 공동선언의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항목이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해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이유다.

한 이웃은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선생님조차 이 대목을 대답하지 못했다더라" 고 했다. "공론화 안된 (金대통령)개인적 안(案)이 마치 모든 국민이 합의한 것처럼 됐다" 는 야당의 지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분단 55년의 역사는 이제 다시 쓰여지고 있다. 세계의 눈과 귀가 쏠려 있다.

그러나 정작 통일의 모든 희망과 부담의 당사자인 우리 국민은 여전히 구경꾼으로 소외돼 있는 느낌이다.

지난달 정상회담 이후 첫 반상회. 그러나 행자부가 전국에 보낸 19개항의 정부시책 홍보자료 중 통일문제는 쏙 빠졌다. 의약분업.산재보험.물놀이 안전 등등으로 채워졌다.

관계자는 빠진 이유를 "신문에 나서 다들 알텐데 굳이…" 라고 했다.

박재규 통일부장관은 4일 국회의 한 포럼에서 "이산가족들이 원하는 지역에 살도록 남북정상이 합의했다" 는 말을 했다가 언론에 보도되자 "왜곡됐다" 고 해명하기도 했다. 홍보부재에다 혼란까지 덤터기로 강요하는 그간의 여러 사례 중 하나다.

더 큰 협상을 위해 감춰야 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대사건의 현장을 국민들은 알 건 알면서 지켜봐야 한다.

통일부의 '2000 통일교육기본지침서' 에도 '정책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유지하면서 국민적 지지와 합의를 바탕으로…' 란 대북정책 추진 원칙은 분명히 적혀 있다.

김석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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