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헌익의 인물오디세이] 색소폰주자 이정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나에게 재즈는 여름의 음악이다. 재즈의 생리가 여름 날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곡식과 과일이 빗물을 빨아들이고, 땡볕을 인내하며 여물어가는 풍경은 참으로 재즈적이다. 그 모습에서 고통을 이내 생산의 희열로 변주하는 재즈 정신을 엿본다.

자연히 재즈를 이끄는 색소폰 또한 여름과 근사하게 어울린다.여권주의자의 타박을 무릎쓰고 말하자면,색소폰은 관능적 곡선미의 금빛 여체를 연상시킨다.

몸통이 저 밑으로 둥글게 휘었다가 붕긋이 솟아오른 소리구멍도 예사롭지 않다. 거기서 밖으로 나온 색소폰 선율은 대체로 뜨거운 대기를 유영하다 더위를 애무한다. 그러다 소나기처럼 갑자기 더위를 식히기도 하고 미풍처럼 속삭이기도 한다.

같은 금관악기지만 트럼펫이 직선이라면 색소폰은 곡선이다.색소폰 소리는 물같다. 산골짝기 개울로,작은 내와 큰 강으로, 때로는 도시의 하수도로 흐르다 증발하여 다시 비가 되어 내리는 물같다.그것은 후미진 뒷골목과 시장통을 돌아,들판과 황야를 배회하다, 다시 도회지로 숨어 들어가야 하는 우리네 삶과도 흡사하다.

바리톤과 앨토,테너와 소프라노의 음역을 각각의 몸통으로 표현하는 악기는 색소폰뿐이기에 색소폰은 사람의 목소리를 대체한다.성악가가 제각각의 목소리로 삶의 애환을 드러내듯, 재즈 색소폰 주자들은 색소폰으로 그들의 인생을 들려준다.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 중에서 콜멘 호킨스.마일즈 데이비스,존 콜트레인,소니 롤린즈,찰리 파커,스탄 게츠 같은 사람들을 더 기억하는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그들이 색소폰 에세이스트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만들어낸 두 가지 예술이 뮤지컬과 재즈라고 한다.그 흑인음악 재즈가 이 땅에서 대중적이라고 할만한 정도의 화제거리가 된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재즈는 매우 수상하게 소비되고 있다.

‘칵테일과 재즈가 흐르는 고급 바의 여피족의 기호품’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재즈가 도시의 네온과 궁합이 잘 맞는 것은 틀림없지만, 여피적 분위기의 소비가 아니라 골치아픈 도시생활에 대한 즉흥적 파격에 의미를 둬야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잃어버린 원초적 땀내를 맡는 것이 재즈를 대하는 순서가 돼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재즈 연주자인 색소포니스트 이정식40)은 대학로로,압구정동으로,그리고 수원여대 대중음악과 교수로, 라디오의 ‘영시의 재즈’진행자로 우리식 재즈의 전도사로 분주하게 떠돌고 있다. 그는 한국 재즈계의 후세대 주자이지만 우리 가락과 장단에 재즈를 접목하는가 하면,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뉴욕에서 론 카터, 케니 배런 같은 일급 뮤지션들과 레코딩을 함께하는 등 한국재즈의 위상을 높이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재즈 연주자에게 정규 교육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는 입지전적인,따라서 매우 재즈적인 인생 편력을 가지고 있어 더욱 흥미를 끄는 뮤지션이다. 중학교 2년때 밴드부에서 색소폰을 처음 잡은 그는 그 후 27년간 오로지 색소폰 하나에만 의지해 전국을 떠돌았고 그 유랑악단의 신산고초를 자양분 삼아 우리 재즈의 가능성을 개척하고 있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이정식은 이미 고교 시절부터 가발을 쓰고 목포,광주로 나가 ‘싸롱’에서 반주를 할 정도로 색소폰에 신이 들려 있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 있을 법한 말썽을 한 번도 피우지 않은 얌전한 학생이었다.그로부터 색소폰과 재즈에 얽힌 사연을 듣는 것이 재즈에 관한 어떤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재즈를 이해하는데 유용할듯 하다.

-어린 나이에 술집악단을 떠돌았다는데 어디를 어떻게 다녔나.

“79년 함평농고 졸업 후 색소폰 하나 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일가 친척도 친구도 전혀 없는 상태였다.길거리에 어는 ‘싸롱’에서 여급과 밴드를 급히 구한다는 벽보를 보고 술집에 찾아 들어갔다.봉천동의 술집이었는데 거기서 먹고 자고 그랬다. 영업이 끝나면 혼자 ‘하숙생’ 같은 노래를 내 식으로 변주해 보고 그랬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재즈가 뭔지 전혀 몰랐다.”

-유랑악단을 따라 전국을 다녔다는 사연은 어떻게 된 것인가.

“술집에서만 마냥 있을 수는 없었다.어쨌든 음악을 하러 올라왔는데 다른 연주자들도 만나보고 싶고 그랬다. 그래서 80년에 악극단에 들어갔다.지방의 영화관 같은데서 쇼를 하면 반주를 맡고 서커스단과도 계약해 떠돌았다. 안가본 데가 없었다. 북쪽으로는 연천 같은 휴전전 근처에서도 연주했고 남쪽으로는 소록도 나환촌 위문 공연도 했다. 소록도 공연에서 비로소 음악이 가진 진짜 힘을 느꼈다. 그 때도 재즈가 뭔지 몰랐지만 그 경험이 내 재즈의 정신적 출발점 비슷하다.진주,포항,고흥,진도 등등 84년까지 약장수 음악만 빼고 그 때 다 해봤다.”

그는 20세 때 결혼했다.떠돌이 악사로 돌아다닐 때 그의 아내는 서울의 단칸방,나중에는 경기도 전곡의 단칸방에서 홀로 지내야 했다.

그와 고향이 같은 그의 아내는 서울서 고교를 다니다 방학 때 내려와 역시 고교생이었던 이정식이 반주를 맡은 고향의 노래자랑에 출전했다가 이정식과 사귀게 된다. 졸업 후 서울로 올라온 이정식은 그 여고생을 찾아 살림을 차린다. 평상적 삶의 파격이 재즈의 변주라면 결혼 또한 재즈인생답다.

-부인을 혼자 놔두고 그렇게 다녔으니 고생을 엄청시켰다.

“그 당시 유랑악단의 수입은 단원들의 끼니도 해결못할 정도였다. 자연히 아내의 고생은 말도못할 정도였다.아내가 전곡에 살 때 마침 경기도 북부에서 공연이 있어 들러봤더니 주인집 아주머니의 생선장수를 도우며 연명하고 있었다.”

-지금은 성공했으니 부인에게 더 잘 해줘야겠다.

“물론이다.”

-유랑악단을 그만 두고 KBS전속악단인 김강섭 악단에 들어간 걸로 아는데 그 계기는 무엇이었나.

“유랑악단을 하다가 도저히 생활이 안돼 악단단원이 모두 광주의 어느 술집에 전속으로 들어갔다.그 당시 광주에 공연차 들른 김강섭 악단의 멤버 몇 사람이 내가 일하는 집에 술마시러 왔다가 색소폰 부는 걸 보고 ‘저 친구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하며 나를 김강섭씨에게 오디션을 보게 했다.거기서 일류 선배 연주자들을 만났고 재즈에 대해 입문하게 됐다.색소폰의 강태환,피아노의 신관웅,퍼커션의 유복선씨 등이 그들이다.김강섭 악단에서 일하며 봉급이란 걸 처음 받아봤고 생할도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김강섭은 김상희가 노래한 ‘빨간 선인장’‘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의 작곡자로 유명하다.

-그 고생을 하다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됐으면 악단에 그냥 있지 왜 재즈의 길로 들어섰는가.

“신관웅씨 등이 나보고 ‘너는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더 좋은 음악,재즈가 있으니까 공부하라’고 했다.그분들 소개로 홍두표(트럼본),이판근(재즈이론가·베이스),이봉조(색소폰),길옥윤(색소폰)선생들에게 사사했다. 특히 길옥윤 선생은 나를 많이 애꼈다.그 분은 85년 일본으로 떠나면서 자신이 쓰던 소프라노 색소폰을 나에게 줄 정도였다.그분들을 미국의 연주자들과 비교 할 수는 없지만 재즈의 혼은 정말 살아있었다.”

길옥윤이 준 소프라노 색소폰을 당시 철없던 이정식은 그 귀한 물건을 어느 악기상에서 테너 색소폰 하나,소프라노 색소폰 하나 해서 2개와 맞바꿨다. 욕심때문이었다.나중에 성공한 이정식은 그 색소폰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결국 못찾고 말았다. 고(故) 길옥윤은 자기 딸이 결혼하면 그걸로 축가를 불어달라고 부탁했는데,나중에 하늘나라에서 그를 무슨 낯으로 볼 지 모르겠다고 했다.

-재즈연주자로 독립은 어떻게 했나.

“김강섭 악단에서 5년간 일하고 나와 86년 본격적인 재즈 4인조팀을 만들었다. 이태원의 클럽에서 하루 5천원을 받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재즈의 진면목에 눈이 떠졌고 음악인으로 참된 보람을 사실 처음 느꼈다. 특히 ‘재즈강국’인 일본의 연주자들과 교류하면서 우리식 재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일보과의 교류는 지금도 매해 계속하고 있다.”

그는 93년 KBS의 심야 쇼 ‘밤으로 가는 쇼’의 시그날 음악을 만들고 악단을 맡으면서 인기의 길로 들어 섰다. 이어 인기가수들의 음반 작업 예컨대 이승철의‘안녕이라고 말하지마’ 같은 노래에 세션맨으로 참여하면서 바쁜 몸이 됐다.그 후 93년 자신의 첫 앨범‘밤으로 가는 기차’를 내고 99년 민요에서 가요까지 순우리노래로만 재즈를 시도한 ‘화두’까지 5장의 앨범을 냈다.

-즉흥성이 우리 음악의 한가지 본질인데 이를 재즈와 접목할 때 재즈의 토착화 나아가 우리음악의 세계화를 위한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어떤가.

“미국 재즈는 흑인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 틀림없다.그렇다면 한국에서 하는 재즈는 한국의 정신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미국 재즈 곡목을 아무리 잘 연주해도 듣는 사람이 한국인이라면 그 가치는 반감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멜로디에 만국공통의 재즈정신을 곁들여 새 장르를 만드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다행히 우리의 장단은 다양하게 세분화돼 있어 음악적 가치가 굉장히 높다.”

-성공 가능성은 어느 정도 보나.

“명창 안숙선,김덕수 사물놀이패 등과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 머지 않아 세계인이 공감하고 즐기는 새 장르가 나오리라고 자신한다. 그 주인공이 내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 가락도 5음계이고 재즈도 기본적으로 5음계이므로 5음계끼리의 변증법적 동서결합같다. 우리 장단이 그같은 결합을 새롭게 포장주고.(5음계는 서양음악의 인공적인 12음계와 달리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힘있게 표현한다.)

“민속악은 다른 나라에서도 5음계인 경우가 있지만 우리의 장단처럼 다양한 것은 세계적으로 없다.또 우리 5음계는 음폭이 매우 넓다. 표현력이 다른 나라 음악과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이것이 재즈와 어우러지면 새로운 음악이 나올 것으로 믿는다.”

-재즈를 겉멋 비슷하게 듣는 경향이 있는데 과거 백인들 앞에서 연주하던 흑인들의 비애나 저항감을 지금도 그대로 갖고 들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재즈정신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재즈는 말하자면 ‘눈물어린 빵’과 같다.‘고통 속에서 트는 희망의 싹’일 수도 있고.그런데 보통사람들은 재즈를 고급 바에서 즐기는 배경음악 정도로 즐긴다.재즈는 분위기가 고급이 아니고 삶의 희노애락의 철학을 색소폰 같으면 그걸로 연주자가 말을 하기 때문에 고급이다.라이브 공연장에서 연주자의 땀내를 유심히 맡아보면 재즈의 정신을 느낄 것이다.”

-연주자는 누구를 특히 좋아하나.

“역시 존 콜트레인이다.그는 흑인사회의 정신을 재즈로 영적 차원까지 끌어 올렸다. 미국에는 존 콜트레인 성당이 있을 정도다.재즈는 구도적으로 공부하는 음악이고 나도 그렇게 가고 싶다.”

그는 “재즈를 알면 인생이 바뀐다”고 했다.무슨 말이냐니까 사람이 철학적으로 된다고 했다.‘혼돈 속의 질서’ 혹은 ‘질서 속의 자유’라는 ‘삶의 부조리한 조화’를 알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이정식은 누구인가>

▶1961년 전남 함평 생

▶중.고교 밴드부에서 색소폰 입문

▶79년 상경 84년까지 술집 밴드, 유랑악단 전전

▶84년 KBS전속 김강섭 악단 주자

▶86~87년 마로니에 야외무대 공연

▶88년 올림픽기념 한강페스티벌 참여

▶91년부터 한.일 문화교류 재즈 연주

▶92년 아시아 재즈페스티벌 한국대표

▶94년 히노 모토하코 밴드와 도쿄.서울.부산 등 공연

▶98년 론 카터 등과 '이정식 인 뉴욕' 녹음 출반

▶99년~현재 수원여대 대중음악과 교수

▶99년 '진주난봉가' 등 수록 앨범 '화두' 출반

▶2000년 6월 한달 정동극장 심야 재즈 공연

이헌익 본지편집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