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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다, 어제를 만나다 ⑩ 나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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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고려 초 전국 12목(牧·지금의 도청과 유사한 지방행정기관) 중 하나로 나주목이 설치된 뒤 912년 동안 300명이 넘는 목사(牧使)가 거쳐갔다. 나주목사의 면면도 화려하다.

삼봉 정도전의 아들 정진, 『홍길동전』의 허균, 행주대첩의 장군 권율, 퇴계학파의 적통 학봉 김성일 등이 나주목사를 지냈다. 전라도(全羅道)란 이름은, 목이 들어섰던 호남의 두 고을 전주와 나주를 합쳐 지었다. 하나 지금의 나주는 늙고 지친 모습이다. 영남의 경주나 안동은 옛 도시의 영광을 제법 번듯하고 고상하게 되살려 놓았는데, 호남의 나주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영산포에 들어선 홍어 거리만 북적일 뿐 나주 시내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다. 막 복원사업이 시작된 옛 나주읍성의 흔적을 따라 걸었다.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 갯마을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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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는 갯마을이었다. 영산강 하류에 하구언이 들어서기 전, 다도해 바닷물은 광주 바로 아래의 나주까지 올라왔다. 지금보다 영산강이 서너 배는 족히 넓었던 시절, 다도해에서 길어 올린 갯것과 남도 들녘에서 거둔 곡식이 영산강 물길을 거슬러 올라 나주에 몰려들었다. 남도의 갯것과 곡식은 나주에 이르러서야 뭍에 올랐고, 나주에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다시 흩뿌려졌다.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전국 유일의 내륙 등대 영산포 등대가 그 증거다. 내륙도시 나주가, 흑산도에서 잡아 올린 홍어를 삭힌 삼합으로 유명한 것도 같은 이유다.

나주는 갯마을이어서 중요했다. 경제적으로도 그랬지만 군사적인 이유가 더 컸다. 영산강 물길을 따라 내륙 깊숙이 침입했던 왜를 막아야 했다. 그래서 나주읍성은 강고하고 굳건한 요새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2005년 복원한 나주읍성 정문 동점문은 정조가 수도 이전을 꿈꾸고 설계한 수원 화성의 정문 팔달문이 연상될 만큼 위풍당당한 풍모를 자랑한다. 고려 말 나주로 귀양을 왔던 삼봉 정도전이 동점문에 올라 연설을 했고, 2005년 복원 당시 도올 김용옥이 현판 글씨를 썼다.

동문 밖에 우뚝 서있는 석당간(보물 49호)에서도 바다를 짐작할 수 있다. 당간은 본래 사찰 입구에 서 있는 기둥인데, 11m 높이의 석당간은 풍수지리의 입장에서 해석되곤 한다. 나주가 들어선 꼴이 영산강에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 하여 나주에 목을 둘 때 돛대의 형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동네에서 지금도 음력 초사흗날 마을의 안녕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장사가 짚고 나니는 지팡이란 뜻으로 ‘장사주렁막대’로 불리기도 한단다.

# 읍성 나주

나주의 다른 이름이 ‘소경(小京)’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표현으로 ‘작은 서울’이란 뜻이다. 나주가 딱 그렇게 생겼다. 금성산을 뒤에 두른 채 영산강이 앞에 흐르고 있고 나주천이 시내를 관통하고 남산이 있다. 서울로 빗대면, 북한산과 한강과 청계천과 남산이다.

지세만 닮은 게 아니다. 나주목의 위세도 서울 못지않았다. 그 증거가 나주목 객사 금성관이다. 금성관은 97평 규모로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객사다. 화려한 팔작지붕을 얹고 있는 본당의 위세가 자못 당당하다.

객사는 지방에서 왕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하여 전국의 객사에는 숱한 사연이 쟁여져 있다. 금성관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정식을 열었고, 명성황후가 시해됐을 때 유림이 모여 곡을 했고, 광주민주화운동 때 나주 시민이 모여 시위를 벌였고, 일제는 금성관을 나주군청 청사로 고쳐서 사용했다. 흥미로운 건 금성관의 현판이다. 힘찬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하나 누가 썼는지 아는 이가 없다.

금성관 주위로 좁은 골목길이 나 있다. 개발을 거치며 옛날보다 많이 넓어졌다지만 여전히 비좁다. 이 골목의 이름이 재미있다. 하나는 연애고샅길. 두 명이 나란히 걸으면 어깨가 닿을 만큼 좁아 남녀가 이 고샅에 들어서면 연애를 한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사매기길도 있다. 고려 때 현종이 거란족을 피해 나주로 몽진했을 때 말 네 마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건너 이 다리를 ‘사마교’라 불렀고 ‘사마교가 있는 길’이 세월이 흘러 사매기길이 됐단다.

읍성 서쪽에 옛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말끔하게 복원된 모습이 아니라 쓰러져가는 흙담 위에 초가집이나 기와집이 위태로이 올라 앉아있다. 다른 지역은 개발로 인해 모두 허물어졌지만, 여기는 갈 데 없는 사람들이 흙으로 올린 성벽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옛 성벽이 그대로 남게 됐다. 지금도 나주에서 형편이 가장 어려운 이들이 여기서 살고 있다.

금성관 옆에 나주목사가 생활했던 목사내아가 있다. 조선시대 20개 목 가운데 온전히 남아 있는 유일한 내아다. 이 내아를 나주군이 한옥체험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5만~15만원. 061-330-8831.

# 성지 나주

나주 금성산은 해발 450m에 불과하다. 하나 낮다고 얕봐선 곤란하다. 금성산은 고려 때 전국 7대 명산으로 꼽혔고, 조선 때에도 11대 명산으로 거론됐다. 여기엔 까닭이 있다. 금성산은 이른바 기가 가장 센 산이다. 고려시대 이후 나라가 제사를 지냈던 전국의 영산 중에서 신당을 5개나 둔 산은 금성산이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나주는 예부터 무당이 많고 또 용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지금도 나주 시내에는 수백 년 묵었다는 신당나무가 곳곳에 서 있고, 당집도 유독 눈에 자주 띈다.

그렇다고 나주가 무속신앙이 횡행하는 마을은 아니다. 나주는 호남을 대표하는 도시였기에 호남의 유교를 대표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그 증거가 나주향교다. 규모나 격식을 따졌을 때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향교로 꼽힌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성균관 대성전을 다시 지을 때 나주향교의 대성전을 본보기로 삼았다고 한다. 나주에선 아직도 향교에서 모여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유림의 도를 배운다. 나주는 호남에서 서원이 가장 많은 마을이기도 하다.

불교 사찰도 많다. 이름난 큰 절은 없지만 의미 있는 절이 여럿 있다. 그중 다보사는 국내 최대 크기의 괘불탱화(보물 1343호)를 모시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조선 영조 연간에 제작된 괘불탱화는 폭 8.5m, 길이 11.4m로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 대중사부에게 공개된다.

답사 정보  나주는 맛의 고장이다. 우선 나주곰탕. 관청이 있던 곳이니 고기도 풍부했고, 그 전통이 곰탕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소뼈를 곤 국물에 양지와 사태를 넣어 다시 고와 국물이 진하다. 나주 목사내아 앞 매일시장 주위에 ‘50년 전통’이라 내다 붙인 곰탕집이 몰려 있다. 7000원. 나주비빔밥도 있다. 고춧가루로 비빈 밥 위에 고명이 얹어져 나온다. 6000원, 청옥(061-331-9391). 홍어를 먹으려면 영산포로 가야 한다. 선창가에 홍어집 간판이 수십 개는 걸려 있다. 간판은 다르지만 가격(4인분용 정식 6만원)은 비슷하다. 여기 홍어도 대부분이 칠레산이다. 나주시가 문화해설사와 함께 금성관·목사내아·동점문 등을 답사하는 버스투어를 운영하고 있다. 어른 1만7000원. 061-330-8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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