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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우리 선생님] 논술신문 만든지 7년 … 명문대 가는 통로됐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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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면

8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구 보성여고 정문. 20여 명의 대입 수시모집 1차 합격생 명단이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서울 시내 학교에서 이 정도야…’ 하고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특이한 건 이들 대부분이 논술 우수자 전형을 통과했다는 점이다. 용산동 2가, 해방촌. 주위에 변변한 학원이라곤 찾을 수 없고, 학부모의 30% 이상이 방적(紡績) 관련 가내수공업에 종사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학생들이 논술에 두각을 보일 수 있었던 건 한 국어과 교사의 열정 때문이었다. 2002년부터 교내 논술신문을 만들며 학생들의 논술 지도에 힘쓴 황재웅(46) 교사가 그 주인공.

서울 보성여고 황재웅 교사(사진 가운데)가 학생들과 함께 만든 ‘논술신문’을 펼쳐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최명헌 기자]

학원 안 다니고 학교서 해결

“1990년대 후반 대학 입시에서 논술고사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논술 광풍’이 불더군요.”

보성여고 몇몇 학생도 1시간씩 버스를 타고 노량진 논술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속앓이만 해야 했다. “논술학원에 다녀도 시험 답안 쓰기에 얽매여 정작 배경 지식과 자신의 논리 구축이 중요한 통합논술엔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좀 더 재미있는 방식으로 논술에 접근하기로 했죠.” 몇 년간 고민을 거듭하던 황 교사는 2002년 ‘논술신문’이라는 대안을 내놓았다.

2002년 겨울방학, 고2에 올라가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논술신문반’을 모집했다. 당시 모인 20여 명의 학생에게 1주일에 두 차례, 6시간씩 논술 글쓰기 방법과 과정을 설명하고배경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자료를 골라 읽혔다. 이후엔 학생들 스스로 자신이 쓰고 싶은 주제와 장르를 직접 정하고, 그에 맞는 자료를 스크랩해 읽으면서 자신만의 논리를 구축하도록 도왔다. 학생들이 쓴 초고를 나눠 읽으며 논리적 모순과 개선방안을 함께 토론했다. 그렇게 해서 2003년 2월 보성여고 논술신문 ‘시사네트워크’가 처음 발간됐다.

“창간호를 만든 학생들이 2004학년도 입시에서 서울대와 이화여대 등 명문대에 많이 합격했어요.” 이후 논술신문은 이 학교 논술교육의 대안이 됐다. 올해에도 20여 명의 수시 1차 합격생 중 7명이 논술반 출신이다. 논술 우수자 전형으로 이화여대 인문과학부에 합격한 노유정(18)양은 “기사를 쓰면서 적어도 2~3권의 관련 서적을 읽으며 배경 지식을 쌓았다”며 “초고를 쓴 뒤 동료 학생이나 선생님과의 토론 과정을 통해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문 제작의 성과 수업으로 확장

논술신문을 만든 지 7년. 요즘은 논술신문반이 ‘명문대 합격을 위한 통로’로 알려지면서 새로 부원을 뽑을 때마다 60여 명이 몰린다. 지난해에는 한국언론재단이 주최하는 전국 학교신문 공모전에 출품해 우수상(2위)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사네트워크에서 맛있는 시사, 시사다큐 등으로 해마다 바뀌어온 신문 이름도 지난해부터는 ‘달콤한 여자의 생각’이라는 뜻의 ‘단미의 혜움’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황 교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2003년 동료 교사들을 설득해 대학별 논술 기출문제를 분석하고 수업 방법을 연구하는 논술연구회를 만들었다. 이듬해부터는 방과후 수업을 활용해 논술 수업을 진행했다. 논술 수업을 원하는 학생들을 학년별로 60명씩 모은 뒤 두 개 반으로 나눠 매주 3시간 논술 수업을 한다. 1학년은 주로 같은 주제의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뒤 토론하면서 생각의 폭을 넓히고, 2학년은 주제별 읽기와 쓰기를 병행한다. 3학년 학생들은 1학기 때부터 대학별 논술고사 특징에 맞춰 기출문제를 풀고, 교사·학생 토론과정을 거친다. 물론 학생 한 명, 한 명의 답안은 논술연구회 교사들이 일일이 첨삭한다. 국어과와 사회과·과학과·수학과 등 전 분야의 교사들이 동참하면서 현재 보성여고 통합논술팀 교사는 15명에 이른다. 황 교사는 “논술신문반만으로는 많은 학생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논술 수업을 제안했다”며 “교사들의 참여가 늘면서 학생들의 대학 합격률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2007년부터는 매년 인근 지역 중3 학생 60여 명을 모아 1년 동안 무료로 논술 수업을 하고 있다. 논술 수업이 유명세를 타면서 보성여고는 인근 지역 학생들이 ‘입학하고 싶은 학교’가 됐다. 김원기 교감은 “통합논술팀을 만드는 과정에서 황 교사가 동료 교사들을 만나 설득하는 모습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꿈을 잃은 학생들을 향한 ‘맞춤식’ 사랑

해방촌은 1·4 후퇴 때 피란민들의 집성촌이었다. 주위에 변변한 공장이나 사업체가 없어 가내수공업이나 동네 수퍼·음식점 운영 외에는 특별한 일거리가 없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저소득층 학생들이 많다. 전교생 760여 명 중 120여 명이 정부로부터 급식비를 지원받는다.

“가정 형편이 어렵다 보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수업시간이면 책상에 누워 자는 아이들이 양산됐고, 아예 등교를 거부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황 교사는 그런 학생들을 방치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잡아주지 않으면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2007년 ‘꿈이 크는 학교’를 만들었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 10여 명을 모아 조회가 끝나면 따로 불러 하루 일과를 직접 짜도록 했다. 참여하고 싶은 수업 외에는 스스로 책을 읽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도록 허용했다. 또 원하는 경우에는 전문가를 불러 미술 치료나 요리 수업, 제2외국어 수업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공부하기만을 강요하면 더욱 엇나갈 수 있다”는 황 교사는 “누군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관심을 쏟는다는 것을 아는 순간 학생의 태도는 변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학기, 가정 형편 등으로 등교 거부까지 했던 C양(18)은 ‘꿈이 크는 학교’에서 일본어 수업을 들으면서 결국 올해 수시모집에서 전문대에 합격하는 등 소기의 성과도 올렸다.

올해로 교사 경력 18년차. 황 교사는 수업 때마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교습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토론 수업을 늘려 학생들에게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운다. “‘읽기-말하기-쓰기’ 통합교육을 정착시키는 게 꿈입니다. 수능과 논술을 아우를 수 있는 나만의 교습법을 만들어 갈 겁니다.”

글=최석호 기자
사진=최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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