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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2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24. 스타들의 첫 모습

탑골에는 출판에 관계되는 사람들이 가끔 왔다.

자신들의 출판사에서 낸 책을 기자들이나 여타 문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일 말고도 출판계약을 하거나 출판계약에 앞서 '인간적 관계' 를 다지기 위해서도 이곳으로 왔다.

때로는 조촐한 형식의 출판기념회도 열렸는데 대개 어른들의 축하말을 잠시 듣고 술은 오래 마셨다.

축하의 노래가 가끔 불리기도 했고 시집 출판기념회의 경우 시를 몇 편 낭송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갓 데뷔한 문인들도 선배 문인들과 어울려 왔으며 때로는 문단에 주목을 받는 문인들이 기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오곤 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란 시집을 낸 최영미 시인도 데뷔하기 전 가끔 나타난 술꾼이었고 '슬픔 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란 시집을 내고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던 허수경 시인도 한동안 단골이었다.

그렇게 어울리면서 서로의 문학이나 살아온 세월들을 이해하면서 우의를 돋우곤 했다.

소설가 신경숙씨도 93년 '풍금이 있던 자리'란 소설집을 낸 직후 탑골에서 만났다.

당시 신씨는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열 평짜리 독신자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고 허수경 시인도 광화문 근처의 조그만 원룸에서 살고 있었는데 처지가 비슷해서인지 자연스럽게 어울려 정담을 나누곤 했다.

신씨는 이후 '깊은 슬픔' '외딴 방' 등등으로 아주 큰 성과를 거두어 만해문학상.동인문학상.현대문학상 등 큼지막한 문학상을 여러 개 받을 만큼 큰 소설가가 되어 지금은 그때보다는 훨씬 좋은 여건에서 집필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허수경 시인은 좋은 시집을 계속 내다가 독일로 유학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스타가 된 문인들이지만 당시 처음 만났을 때는 왜들 그렇게 수수하고 참하게 보였든지…. 물론 지금도 그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겠지만 당시의 모습이 내겐 훨씬 매력적이다.

지금은 '문학동네' 대표인 강태형 시인, 김사인 시인, 소설가 김성동 선생, 신문사 문학담당 기자였던 박찬 시인, 문학평론가 김훈 선생, 강형철 시인 등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신경숙씨는 시종 별 말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씨를 익살스럽게 소개하였다.

"에 이 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이 황인숙 시인이 '북구풍의 미녀' 라고 말했던 것에 비추어 전혀 손색이 없는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서 85년 문단에 데뷔한 이래 심산유곡에서 붓과 펜을 갈고 닦아, 갈아 치운 붓펜이 수 천 자루요 아직 갈아야할 펜이 10킬로 그램은 너끈히 남아있는 신예 소설가…. "

그러자 한쪽에서 말을 받았다.

"아니 미인이라고 했으면 확실히 밀고 나가야지 느닷없이 사람 운운허는 것은 뭐여!

내가 보기엔 촌이서 금방 올라온, 오라버니 논에서 일할 때 샛거리 내러 갔다가 느닷없이 승질나서 상경헌 사람같고만. "

"에이 사람들 이렇게 놀리고 그러면 쓰나. 신경숙씨 고향이 정읍이지 나도 거기여. 나 정읍 동국민학교 나왔는디 어디 나왔능가?" 뒤에서 다른 사람들을 제지하고 나선 사람은 박찬 시인이었다.

아무튼 그런 저런 모습으로 그들은 서로를 소개하고 익혀갔는데 그런 자리들을 통해 서로의 작품에 대한 흉허물없는 품평을 통해 성장해가고 또 성숙되어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자리의 뒷끝에서 신경숙씨가 노래를 불렀는데 정태춘 박은옥의 "북한강에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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