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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창건 기념일 전날 무슨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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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8일 밤과 9일 새벽 북한 양강도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발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정부와 미국 측은 '핵 실험'일 가능성은 일단 없다고 보고 있다. 당사자인 북한은 입을 다물고 있다. 지난 4월 22일 용천역 열차 폭발사고가 난 이튿날 국제사회에 바로 지원을 요청했던 것과는 양태가 다르다.

정보 당국은 폭발 지역의 정보 분석에서 ▶북한군 탄약고 폭발▶벌채용 다이너마이트 폭발▶군용 기름 저장고 폭발▶열차 폭발 등의 가능성을 다각적으로 내놓고 있다.

▶ 한국 항공우주연구원이 2000년 9월 26일 아리랑 위성으로 촬영한 북한 양강도의 김형직군. 개마고원의 험준한 산악지형인 이 지역의 영저리엔 노동미사일 기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영저리 위엔 월탄리가 있다. 대규모 폭발은 영저리나 월탄리 주변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 "핵 실험 아닌 듯"=국가안전보장회의(NSC) 관계자들은 핵실험일 수 없다고 단정했다. 북한이 중국과의 인접 지역에서 낙진을 수반하는 핵실험을 강행, 중국과의 관계를 손상시키는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낙진 현상과 방사능의 대기 유출은 미국은 물론 인접 국가에서 즉각 확인된다. 낙진이나 방사성이 검출되지 않은 점도 핵실험이 아니라는 주장의 또 다른 근거다. 핵실험 때 발생하는 버섯구름도 없었다고 한다. 정보 당국에 따르면 폭발 당시 구름이 많이 끼어 위성사진 판독에 어려움이 있지만 핵폭발의 버섯구름으로 볼 내용은 없었다고 한다. 단 직경 3㎞가 넘는 구름의 중앙부에는 시꺼먼 색깔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정부 당국자는 "소형 화재로 인한 연기로 보기엔 구름의 크기가 크다"며 "중앙부의 검은 색깔은 대규모 폭발로 생긴 검은 연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 핵 전문가들은 지하 100m 이하에서 핵실험을 할 경우 지상 핵실험에서 드러나는 버섯구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폭발이 다른 원인으로 발생했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진 핵실험이 아니라고 최종 판단을 내리기는 이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 탄약.기름.다이너마이트 폭발 가능성=8일 밤 폭발 당시 우리의 지진감지시설에선 리히터 규모 2.6의 진동이 감지됐다. 북한에서 지진 발생은 없었던 만큼 이 진동은 폭발의 충격파로 분석됐다. 남한에서 진도를 느낄 정도라면 화약 등의 폭발물이 터지는 대규모 폭발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보 당국에 따르면 폭발 장소로 추정되는 후창역 지역에는 10군단 교도대의 탄약고가 있다. 탄약고가 폭발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군의 연유창고(유류창고)가 후창역사 주변에 있다는 분석에 따라 기름이 폭발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또 후창 지역은 울창한 산림 지역이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통나무 벌목 때 다이너마이트가 많이 쓰인다. 벌목을 위해 집적했던 다이너마이트가 터졌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 정보 당국 관계자는 "폭발 지역은 김형직군 영저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노동미사일 기지와는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미사일 기지에서의 폭발 가능성은 작다고 보았다.

◆ 제2 용천사고?=정보 당국 관계자는 "위성사진 분석 등을 보면 철도가 지나는 지역에서 폭발이 발생한 것 같다"고 했다. 용천사고와 마찬가지로 군수 물자나 질산화나트륨 등의 인화 물질을 싣고 가던 화차가 역사 인근에서 폭발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규모는 용천사고 때보다 큰 것으로 파악된다. 정보 당국에 따르면 김형직군에는 만포와 혜산을 오가는 북부선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후창역은 이 철도의 한 역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폭발이 우발적 열차 사고였다면 4개월 만에 다시 발생한 같은 종류의 재난이 된다"며 "이는 쇠락해 가는 북한 당국의 위기관리 체제에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왜 9.9절 전날인가=폭발 물질이 무엇이건 간에 정보 당국이 주목하는 것은 폭발 시점이다. 8일은 북한 정권 수립일 전날이다. 공화국 창건일을 앞두고 사회 불만 세력이 반발하며 일으킨 고의적 사고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추측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후창 지역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그 집안 가족들을 위한 지하 시설이 있다는 탈북자들의 주장도 이런 면에서 주목된다. 하지만 현재로선 확인하기 어렵다. 폭발이 시간 간격을 두고 두 차례 발생했던 점도 정보 당국이 우발적 사고가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유다.

◆ 건재 과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사고가 국제사회에 알려진 12일 북한 당국은 김 위원장의 일정을 공식 보도했다. 조선중앙방송은 이날 김 위원장이 리창춘(李長春)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일행을 접견했다고 전했다. 용천역 폭발사고 직후와는 다르다. 당시 북한의 관영 매체가 김 위원장의 행적을 공식 보도한 것은 사고 10여일이 지난 5월 3일이었다. 반면 이번 폭발 직후에는 비록 예정됐던 면담이지만 북한 당국이 김 위원장의 행적을 공개했다. 지난 용천사고 때와는 북한 당국의 태도가 다르다.

◆ 대미 협박용인가=일각에선 북한이 고의적으로 '위장 폭발'을 했다는 얘기도 흘러 나온다. 이른바 '북한의 10월 핵실험설'이 급속하게 유포되던 상황에서 미국과 국제사회를 향해 '북한 입장을 수용하지 않으면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위장 폭발을 위해서라면 인적이 드문 후창역 주변은 적절한 장소다. 그러나 이런 가설은 핵실험 여부가 낙진.버섯구름 등으로 즉각 확인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채병건 기자

*** 양강도 폭발 관련 일지(한국시간)

▶9월 8일 오후 11시, 9일 오전 1시=양강도 김형직군(옛 이름 후창군)에서 대형 폭발사고. 한국 관계기관 두곳에서 동시에 파악. 리히터 규모 2.6 의 진동

▶12일 오전 9시=국가안전보장회의(NSC) 2시간30분 동안 회의

▶12일 오전 9시13분쯤=뉴욕 타임스 인터넷 판, "조지 W 부시 대통령, 북한이 첫 핵무기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 최근 받았다"고 보도

▶12일 오전 11시14분=연합뉴스, 베이징 소식통을 인용, "9일 오전 11시쯤 양강도 김형직군에서 대규모 폭발 있었다"고 첫 보도

▶12일 오전 11시40분=정동영 통일부 장관, "폭발 징후가 있다는 보고가 있어 확인 중이다. (핵 실험과는) 무관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언론에 확인

▶12일 오후 2시쯤=김종민 청와대 대변인, "대통령에게는 사고 인지한 후 서면으로 바로 보고가 됐다.보고된 정확한 날짜는 언제인지 밝히기 어렵다. 대형 사고가 있었다는 정도만 인지했다"

▶12일 오후 2시55분=로이터통신, 미 국무부 소식통을 인용, "핵 폭발이나 실험과 관련없는 게 상당히 확실하다"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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