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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 악몽’잊으려 학교갈 때 우울증 약 먹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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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경기도의 ‘학대 피해 아동을 위한 쉼터’ 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놀고 있다. 아동 보호 전문기관 조사 결과 학대 사실이 인정되면 아이는 부모로부터 격리돼 쉼터로 온다. [굿네이버스 제공]

19일은 세계 아동학대 예방의 날이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이 채택된 지 20년째다. 국내에서 아동 학대 문제가 부각된 것은 1998년이다. 부모가 남매를 굶기고 학대해 누나는 숨졌다. 부모는 딸을 집 앞마당에 몰래 묻었다. 남동생(당시 6세)은 극도의 영양 결핍 상태로 발견됐다. 일명 ‘영훈이(가명) 남매 사건’이다. 2000년 ‘학대받는 아동을 부모로부터 격리’시키는 내용을 담은 아동복지법이 개정됐다. 고교 1학년이 된 영훈이(17)는 사건 발생 1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훈이는 경기도 수원의 한 다세대 주택에 산다. 학대받은 아이를 보호하는 쉼터다. 영훈이는 정상적인 삶을 되찾아가고 있지만 아침에 등교할때 우울증 치료를 위한 약을 먹고 있다. 98년 4월 경기도 의왕시 한 주택에서 발견된 6살 영훈이의 몸은 처참했다. 등에는 다리미 자국이 나 있었고, 발등엔 쇠젓가락으로 찔린 상처가 있었다. 위액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의사는 “2주가량 굶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마당에서 발견된 여자 어린이의 시체를 부검한 결과 ‘굶어 죽은 것’으로 판명됐다. 영훈이 부모(친부와 의붓어머니)는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한 달간 병원에서 치료받은 영훈이는 젊은 부부 가정에 위탁됐다. 하지만 어린 영훈이는 폭력적이었다. 어린이집에서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젊은 부부는 영훈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했다. 1년 후 영훈이는 중년 부부 가정에 재위탁됐다. 그러나 역시 1년여 만에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폭력’으로 인해 위탁 가정에서 나와야 했다. 영훈이는 2000년 지금의 쉼터로 들어왔다. 지속되는 심리 치료에도 영훈이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첫걸음은 ‘아픈 기억을 스스로 말하는 것’이다. 영훈이가 11살이 된 2003년 처음으로 자신의 아픈 기억에 대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옷을 들추고 등에 다리미를 댔다. 타 죽는 줄 알았다. 발등의 상처는 어머니가 젓가락으로 찔러 생겼다”고 했다. 그리고 2005년(13세) 누나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누나가 먹을 것도 가져다 주고 고마웠는데,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요.”

‘누나’라는 말을 꺼내는 데 8년이 걸렸다. 영훈이를 담당한 치료사는 “학대 대상자(부모)나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는 상대(누나)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고 난 뒤 피해의식과 죄의식이 한결 가벼워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큰 상처를 받아 자기 속으로 숨어버린 영훈이는 그렇게 밖으로 나왔다. 김정미(40·여) 경기도 성남 아동보호전문기관장은 “영훈이는 학대의 기억에다 버림받았다는 상처까지 모두 짊어져야 했다”고 말했다. 누나에 대한 얘기를 시작한 그해에 영훈이에 대한 심리 치료는 중단됐다. 심리 상태가 안정되기 시작됐고, 영훈이도 더 이상 치료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치료된 건 아니었다. 영훈이는 중학교 졸업 후 고교 진학과 적응 문제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극도로 민감해졌다. 영훈이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 2008년 겨울부터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 김 관장은 “학대를 받은 시기가 어릴수록, 대상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처가 깊어 성인이 돼서도 고통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영훈이에게도 희망의 싹은 트고 있다. 드럼과 여자친구.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서 영훈이의 삶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아동보호 대책 어디까지 왔나=영훈이 사건으로 아동복지법이 바뀌고 전문 보호기관도 세워졌지만 선진국과 비교할 때 보완할 점이 많다. 경찰대 표창원(경찰행정학) 교수는 “캐나다에선 모든 사람을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로 정한 법이 있다”며 “피해 아동 지원은 아동보호법으로, 가해자 처벌은 형법으로 엄정하게 나눈 것도 특징”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선 아동복지법의 학대·방임금지 조항에 따라 가해자를 처벌하는데, 형법보다 형량 수준 등이 낮다. 특히 학대아동 보호는 ‘가해자 처벌’과 함께 ‘피해자 지원’이라는 두 축으로 이뤄지지만, 피해 아동을 위한 시설 지원 등이 모자라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수원=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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