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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지우고 맨발로 노래했어요,나를 없애고 자유를 노래한 거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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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호 02면

2 이은미의 서울 합정동 스튜디오에는 그녀의 20년 공연인생을 보여 주는 포스터가 빼곡히 붙어 있다. 발 모형은 한 행사장에서 이벤트로 만든 것이다.
1 신작 앨범 재킷 속의 이은미

지난 3일 늦은 오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지하 스튜디오 ‘NEO-MUSIK’. 두 손을 비비며 막 사무실로 들어온 가수 이은미(43)씨에게 해 떨어지기 전에 나가 사진부터 찍자고 보챘다. 기상청이 겨울 추위라고 예보한 날이었다. 포즈를 취하면서 그는 사진기자에게 “춥지 않나요”라고 몇 번이나 물었다. “야외 공연 해 봐서 알아요. 이런 날 쇠붙이를 들고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사자머리 여걸에게서 이런 소리를 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객석을 얼렀다 다독였다 쥐락펴락하는 카리스마는 이미 느껴 봤다. “노래할 때 입만 벙긋대는 가수는 가수가 아니라 립싱커라 불러야 한다”고 일갈하고 “방송국 음향시설이 왜 이렇게 형편없느냐”는 직격탄을 날려 PD들을 쩔쩔매게 한다는 그다. 까칠하고 심지어 무섭게까지 보였던 가요계 잔다르크는 스튜디오 한가운데 가져다 놓은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았고, 이윽고 두툼한 방음문이 닫혔다. 그의 목소리는 다소 허스키했고 약간 느렸지만 자분자분 귓가에 와 닿았다.

벌써 20년입니다.
“패티 김과 이미자(51년), 조용필(41년), 인순이(31년), 이승철(25년) 선배님도 계시는데 저는 이제 20년입니다. 숨이 턱에 차서 달려갈 뿐이죠.”

20주년 기념 공연이 4월 18일 부산에서 시작됐죠. 본격화된 6월 이후엔 거의 주말마다 무대에 오르고 있는데.
“내년 말까지 70여 개 도시를 돌 예정입니다. 미국과 캐나다도 다녀왔고요. 군산이나 김해, 양주 같은 지방 소도시에서도 호응이 뜨거웠어요. 그분들이 서울이나 부산까지 가서 공연 보기란 쉽지 않거든요. 그만큼 문화적 갈증이 있었다는 거죠.”

3 이은미의 앨범들

그래서 지역 문화예술회관 공연을 시도했군요.
“전국에 이런 곳이 140개가 넘어요. 치적 과시용으로만 두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이런 곳이 활성화돼야 지역 문화가 살고 또 공연이 산다고 봅니다. 힘들어도 해야죠. 후배 음악가들을 위한 사명감이기도 하고요.”

4 2002년 합정동 시절. 중앙포토 제공

체력적으로 힘들진 않나요.
“체력보다 긴장감을 조절하는 게 중요해요. 일주일에 나흘은 공연 준비에 쓰고 사흘은 쉽니다.”

언제부터 맨발로 노래하기 시작했나요.
“‘기억 속으로’ 녹음을 위해 토론토를 갔는데 정말 최고의 시설이었어요. 청바지 스치는 소리가 천둥 번개처럼 들렸어요. 집중이 안 됐죠. 다음 날 다시 갔을 때 신발을 벗어 봤어요. 딱 밀착감도 있고 소리도 안 나더군요.”

‘맨발의 디바’란 말은 어떻게 붙었죠.
“첫 장기 공연이 하루 두 번씩 11일간 공연하는 초강행군이었어요. 5일 지나니 목소리가 안 나오더군요. 그때 거울을 봤어요. 욕심이 그득한 얼굴이었어요. 이건 아니구나. 메이크업도 지우고, 귀고리도 떼고, 하이힐도 벗었어요. 자유로웠고 그 느낌이 좋았어요. 내가 없어야 내 노래를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TV에서도 맨발이었죠.
“노영심씨와 함께하는 무대였는데 그날 너무 몸이 안 좋아 PD에게 ‘신발 좀 벗어야겠다’고 했어요. 염색도, 찢어진 청바지도 안 되는 시절이었죠. ‘공영방송에서 웬 맨발이냐’와 ‘역시 이은미다’는 주장이 엇갈렸어요. 담당 PD가 감봉 처분을 받았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고 당황했습니다.”

과천 공연 때 보니 처음부터 맨발은 아니던데.
“어느 순간부터 ‘맨발의 디바’라는 말에 안주하게 되더라고요. 슬그머니 오만해지고. 맨발의 부담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어요. 처음부터 신발을 벗을 때도 있고, 공연 중 벗을 때도 있죠. 그 틀에서 자유롭고 싶어요.”

공연 중에도 스태프들에게 음향에 대한 요구가 많던데요.
“저희는 소리를 다루는 프로거든요. 마음에 드는 무대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많이 못살게 굴죠(웃음). 객석에는 완벽한 소리와 사운드를 던지고 싶어요. 그것을 관객이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 줄 때 제게 완전한 몰입의 순간이 찾아와요. 시간이 정지한 듯한, 진공 상태 같은. 그 느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죠.”

그렇게 무대에서 무아지경에 빠진 적이 네 번 있었다면서요.
“이번 투어에서도 한 번 있었어요.”

그게 언제입니까.
“기억하지 않아요. 스스로 틀을 만들면 제 꾀에 넘어가게 돼요. 언제, 어디 공연이 좋았지 되새기다 보면 욕심과 집착이 생겨요. 그냥 좋았구나 생각만 하고 잊어버리죠.”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그에겐 많은 일이 일어났다. 1997년 아시아 송 페스티벌과 98년 히로시마 세계음악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하지만 3집과 4집 앨범 제작 과정에서 그만 사기를 당했고 온몸으로 뛰며 뒷감당을 해야 했다. 공연으로 모든 것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몸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간’듯한 증세가 찾아왔다. 노래도, 생각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2년 넘게 그런 증세가 계속됐다. 훌쩍 떠난 여행, 해인사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지금까지 너 좋은 대로 살았으니 이제 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살아라”는 일침에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와 2005년 6집 앨범을 내놓았다. ‘애인 있어요’가 담겨 있는.

주지하다시피 이 노래는 이은미의 대표곡이자 대한민국의 대표곡이 됐다. 얼마 전 한국갤럽이 창립 35주년을 맞아 벌인 설문조사에서 ‘노래방이나 각종 모임 장소에 갔을 때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1위에 꼽혔다. 노래방 기기 제조업체 금영이 집계한 ‘2008년 노래방 애창곡’에서도 1위를 차지했고 음악 포털 엠넷 차트에는 100위권에 무려 71주(2009년 5월 넷째 주까지)나 머물며 최장기 포진 기록을 세웠다.

‘애인 있어요’ 대성공 이후 뭐가 바뀌었습니까.
“객석에 ‘이은미 짱’이라는 피켓을 든 10대 소녀들이 보이는 거요. 연세 드신 분과 어린 자녀가 함께 공연장을 찾아 주시는 경우도 늘었고요. 또 ‘기억 속으로’나 ‘어떤 그리움’ 같은 초기 앨범까지 다시 팔리고 있죠. 제 노래에 다시 생명력을 주셨다는 점에서 정말 감사하고 또 자랑스럽습니다.”

노래방 최고 히트곡을 부르면 돈도 많이 버나요.
“노래방에서 많이 불려도 가수에게는 저작인접권이라고 해서 저작권 사용료의 2%밖에 안 돌아와요. 선배들은 음반이 90년대에 터져 줬으면 정말 대단했을 거라고 하죠. 음반 가격이 1만원 정도 하는데 내려받는 데는 500원에서 1000원 정도 하니까 외형적 매출이 10배 줄어든 셈이잖아요.”

곡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작곡자 윤일상군은 댄스곡도 잘 만들지만 발라드도 좋아요. 이건 좀 전문적인 얘긴데, 그가 만든 두 곡을 하나로 합친 게 이 노래예요. 합치는 게 좋을 것 같았죠. ‘기억 속으로’도 원래는 리듬앤블루스였어요. 제가 ‘이건 발라드로 풀어야 해요’ 했더니 작곡자 선생님이 좋다고 하셨고요. 앨범으로 나올 때까지는 노래가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몰라요.”

최진실씨 힘도 컸죠.
“생전에 결국 못 만나 너무 아쉬워요. 계신 곳에 한 번 찾아가려 했는데 마침 유골함 도난 사건이 터지더라고요. 언제 조용히 다녀오려고요.”

노래방엔 자주 갑니까.
“거의 안 가요. 멤버들과 가끔 저희 집에서 음반을 듣죠. 조금 괜찮은 스피커가 있는데 옛날 음반을 들려 주면 다들 감탄합니다. 거기 답이 다 있어요. 음반이 선생님입니다. 잘 들어야 해요.”

귀가 예민해 노래방 가서도 음향을 조절한다는 얘기가 사실이군요.
“(이 대목에서 그는 상체를 다 숙여 가며 큭큭 웃었다.) 제가 사실 컬러링 소리도 못 견뎌요. 잡음이 섞여 있잖아요. 차라리 따르릉 벨소리가 낫지.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음악이 얼마나 빨리 소모되나요. 그게 참 미칠 노릇이에요. 요즘 디지털 리마스터링 앨범이 많이 나오는데 사운드는 깨끗해졌을지 모르나 앰프의 공간감은 사라졌어요. 비틀스에 가부키 화장을 해 놓으면 그건 비틀스가 아니잖아요?”

본인 노래는 어떻다고 보나요. 쉬운 노래는 아니잖아요.
“대중음악가에는 두 종류가 있죠. 저는 대중의 취향을 맞추기보다는 새로움을 전해 드리고 싶은 쪽이죠. 앨범이 나오고 2~3년 뒤 히트하는 것도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요.”

일부러 어려운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닌가요.
“제 노래가 어렵다는 분들은 아마 노래보다 노래에 실린 감정을 살리기가 어렵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이은미 노래의 감정은 전달하기 힘들어. 내가 노래하면 이상해. 그 맛이 안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애인 있어요’는 다들 잘 부르시잖아요.”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은.
“어덜트 컨템퍼러리 계열이에요. 성인들이 곱씹을 수 있는.”

올봄에 낸 미니 앨범에 실린 곡들은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했는데.
“제 음반을 사고 공연 보러 오는 분들은 참 대단한 분들이세요. 신문과 인터넷으로 소식을 듣고, 티켓을 예매하고, 약속하고, 만나고, 줄 서고, 함께 즐기죠. 이번에는 그런 분들이 듣고 싶어 하는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노래가 아닌. ‘헤어지는 중입니다’가 다섯 시간 만에 차트 1위에 올랐다고 해서 깜짝 놀랐죠.”

좋은 노래는 무엇입니까.
“좋은 노래란 없어요. 대중음악은 세상에 나간 순간부터 대중의 것입니다. 평가는 각자 하는 거죠. 당신이 부르는 노래가 좋은 노래입니다.”


이은미는 누구

1966년 서울 서대문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중학교 때부터 청계천에서 LP판을 구해 들으며 팝송에 심취했다.
사라 본의 앨범을 처음 들은 느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동명여고 졸업. 고1 때 영아원 봉사 경험 당시 충격으로
가수가 아니면 특수학교 교사가 됐을 것이라고.
86년 신촌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조지 벤슨의
‘The Greatest Love of All’을 일주일 연습하고 불러
기립박수를 받은 뒤 음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89년 신촌블루스 3집에 객원 보컬로 참가했으며
‘기억 속으로’(92), ‘어떤 그리움’(94) 등을 잇따라 히트시켰다.
3집 ‘자유인’(97)과 4집 ‘비욘드페이스’(98)는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2000년 리메이크 앨범 ‘Nostalgia’의 성공으로
합정동에 스튜디오를 마련해 지금까지 여기서 연습하고 있다.
2005년 6집 ‘마 농 탄토’에 실린 ‘애인 있어요’가
2008년 최진실·정준호 주연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삽입되고,최진실이 생전에 가장 좋아한
노래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공전의 히트를 쳤다.
지난 봄 미니 앨범 ‘소리 위를 걷다’를 내고
현재 데뷔 20주년 전국 콘서트 투어 중이다.
지금까지 그의 라이브 공연은 700회에 육박한다.
앨범 타이틀부터 공연 포스터 디자인까지 모두 직접 챙긴다.
가끔 귀를 쉬게 하기 위해 북한산에 간다.
스킨스쿠버를 하며 느끼는 절대 고독도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팬클럽 이름은 ‘맨발’. “맹목적인 애정은 필요 없다”며
“냉정하게 모니터링해 달라”는 것이 이은미의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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