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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광장] 알콜 도수가 '표심 바로미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정치와 술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우선 보드카를 즐긴 것은 러시아의 민중들이었지만 보드카로 생기는 수입은 황제와 통치자들의 것이었다. 보드카를 제외한 나머지 술은 밀주가 대부분이었고 국가 주세의 관리에서 빠져 있었다.

특히 보드카는 황제의 허가를 얻은 곳에서만 제조.판매가 가능했다.

따라서 보드카의 제조와 판매를 철저히 관리한 황제들은 황실근위대의 수를 늘리고 귀족들을 억압했으며, 풍부한 재원을 무기로 정치를 좌우했다. 그렇지 못했던 황제들은 귀족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최근 2~3년 사이 러시아 맥주시장이 연 20%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 독주(毒酒)의 나라 러시아에서 이처럼 맥주 소비가 늘 때는 온건한 정치세력이 출현해왔다. 반면 보드카가 많이 소비되면 극단주의적 경향의 정치인들이 득세했다.

1991년 무명의 극우 민족주의자이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는 대통령선거에 출마, 당선되면 유권자들에게 보드카 한병씩을 선물하겠다고 해 일약 3위를 차지했다. 93년 12월 국가 두마 선거 때는 보드카를 당시 시세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4루블에 판매하겠다고 선언해 그가 이끌었던 자유민주당 돌풍을 일으켰다.

반대로 고르바초프는 보드카를 잘못 다뤄 소련을 해체시키고 권좌를 내놓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시도했던 것은 금주법이었다. 업무 중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고, 보드카 소비를 줄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정책은 보드카 민심이란 러시아의 독특한 생활을 무시한 처사였다.

"영하 40도의 시베리아 혹한(酷寒)에서는 마누라 없이도 흑빵 한덩어리와 보드카만 있으면 일할 수 있다" 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속담이 있다.

그래서 보드카가 위무하는 러시아의 민심조차 읽지 못했으니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91년 12월 모스크바 교외 '노보 오가레브' 에선 소련이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 결성을 위한 회원국 정상들의 모임이 있었다. 당시 세계 각국의 기자들은 회담장 밖에서 꽁꽁 얼어붙고 있었다.

그러나 회담장 안에서는 독한 보드카가 각국 정상들을 녹이고 있었다. 난마처럼 얽힌 의제들로 회담이 진척을 보이지 않자 보리스 옐친을 비롯한 정상들이 보드카를 주문한 것이다. 보드카가 들어간 후 회담속도가 빨라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독립국가연합 건설이라는 역사적 선언문 낭독은 대취한 옐친이나 레오니드 크라프추크(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가 아닌 비교적 덜 취한 나자르바예프(현 카자흐스탄 대통령)가 대독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개혁 만개의 분위기였던 95년 총선 때는 맥주 애호당이 탄생했다. 당시 러시아 정치가 전반적으로 온건주의적 경향이었던 덕분에 급조된 친(親)옐친정당 우리집-러시아당도 2등을 차지했다.

최근 러시아의 맥주소비가 연 20%씩 증가하는 가운데 실시된 지난해 총선에서도 온건파로 급조된 친크렘린 정당 에딘스트보(단합)당이 2위로 약진했다.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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