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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한 ‘책임정치가’ 한규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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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한규설은 지금의 서울 명동 부근 조동(현재 장교동)에 살았기에 조동대감으로 불렸다.

한규설(1848~1930)은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손에 목숨을 잃은 한규직의 동생이다. “한규직은 동래수사로 있을 때 호랑이처럼 포악하고 늑대처럼 재물을 탐해 뇌물을 바치는 이들이 줄을 잇고 비취색 비단만도 5000필이나 갖고 있었다. 이런 그를 우영사로 삼았고 아우 한규설도 28세에 진주병사로 발탁해 어머님을 모시고 부임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는 특별한 예우다. 한규직이 죽자 고종은 그를 총애하던 마음을 아우에게 옮겨 그에게 형의 관직을 주었다(『매천야록』).” 무반집안 출신 한씨 형제는 고종의 총애를 받은 총신이자 민씨 척족정권의 실세로 부귀를 누리던 특권층이었다.

특히 한규설은 1902년 올린 상소에서 “황상폐하와 저는 의리로서는 임금과 신하 간이지만 은혜로는 부자간이나 다름없다” 할 만큼 최측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절대 권력에 빌붙어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한 간신배가 들끓던 그때 황실과 국가의 앞날을 걱정한 몇 안 되는 충복이었다. “『주역』에 ‘나라를 세우거나 집안을 이어 나가는 데는 소인(小人)을 쓰지 않는다’ 했습니다. 소인이란 나라는 염두에도 없고 자기 한 몸만 살찌게 하려는 자이니 어찌 국가의 이해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폐하가 가까이 부리는 자가 다 그러한 무리입니다. 폐하의 급무는 이러한 자들을 멀리하시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믿고 쓰시는 것입니다.” 황제는 그때 그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다. 3년이 지나지 않아 나라는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각료들 한 명 한 명에게 찬부(贊否)를 물으며 조약의 체결을 강박하던 그날. 그는 절대불가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도 없나이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사직에 순국하면 망할지라도 천하에 할 말이나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하고 망하면 추한 냄새를 만년에 남길 것이오이다.” 황제에게 올린 간언이 잘 말해 주듯이, 오늘 우리가 그를 기리는 이유는 그가 위정자로서 저지른 잘못을 회피하지 않으려 한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책임정치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1910년 일제가 준 남작 작위를 거부했으며, 1920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만들고 그 뒤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키는 등 민족의 미래를 위한 교육 사업에 여생을 바쳤다. 11월 8일은 그의 기일이었다. 사리사욕보다 공공선을 우선한 그의 정신은 한 세기를 건너뛰어 위정자만이 아닌 시민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의 자세를 가다듬게 만드는 거울로 다가선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