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의 베스트셀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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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책은 문화의 척도다.

20세기는 특히 그랬다.

그런 책 얘기를 하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베스트셀러다.

베스트셀러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한 책이요 상업주의의 병폐 속에 왜곡돼 피어났다는 일부 지적도 있지만 대중과 함께 해온 문화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베스트셀러 한 권 한 권에 담겨진 의미와 책 이면에 펼쳐진 시대상, 그리고 그 출간 스토리에는 곧 우리의 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이기도 한 '20세기의 베스트셀러' 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소장 한기호)와 함께 선정하고 20세기 한국베스트셀러의 흐름을 짚어본다.

[편집자]

책 1권으로 7억원. 밀리언셀러 1권이 작가에게 가져다주는 몫이다.

20세기는 그 꿈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최초의 밀리언셀러의 기록을 세운 김홍신의 '인간시장' 을 필두로 억만장자의 꿈을 이룬 책들이 줄을 이으면서 20세기 최고 베스트셀러 경쟁은 막이 올랐다.

80년대 밀리언셀러 제조기는 이문열이다.

'이문열 신드롬' 이란 용어까지 만들어 낸 그는 '사람의 아들' '황제를 위하여' 등 문학적 향기가 짙은 소설과 함께 '레테의 연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 통속연애소설의 골격을 갖춘 대중 작품을 잇달아 쏟아내며 그는 엄청난 고정독자를 확보한다.

그 여세를 몰아 88년에 펴낸 '삼국지' 는 한글세대에 맞는 문체와 동양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출간 후 10여 년 간 1천1백30만 부가 팔려나가 20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됐다.

특히 출간 후 매년 70만 부 정도 판매되던 '삼국지' 가 93년 서울대 수석입학한 최지훈군이 "논술고사를 위해 이문열의 '삼국지' 를 13번 읽었다" 고 말하고 나자 그 판매부수가 2배 이상 늘어나기도 했다.

이문열의 높은 아성에 도전장을 내면서 어깨를 나란히 한 장르가 역사소설류. 그래서 80년대를 대하 역사물의 르네상스기라 부르기도 한다.

이를 주도한 작가들의 면면도 박경리.정비석.황석영.조정래 등으로 화려하다.

79년 나온 박경리의 '토지' 를 필두로 84년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 , 86년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 잇따라 나왔고 76년 출간된 황석영의 '장길산' 도 80년대 황금기를 구가했다.

'소설 손자병법' 이 5백만 부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모두 3백만 부를 훌쩍 넘어 20세기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서울대 국문학)교수는 "80년대는 문학이 정치의 출구였다.

교과서에서는 일제강점기만 다루고 해방구 등 예민한 시기는 다루지 않아 독자들은 태백산맥이나 장길산에서 역사를 배우는 꼴이었다" 며 "그 때문에 문학작품이지만 순수 문학독자 외에 일반 독자들의 손길을 끌어올 수 있었던 것" 이라고 분석한다.

시집으로는 첫 밀리언셀러 기록을 세운 서정윤의 '홀로서기' 도 80년대 후반의 산물. TV.라디오를 순식간에 점령하며 소년.소녀들의 애틋한 가슴을 사로잡았다.

출간 전 무명시인이었던 서씨는 출판사에서 시집을 낼 때 4백 부를 사는 조건으로 가까스로 2천 부를 발간했으니 베스트셀러의 향방을 점치기란 무척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훨씬 세련되고 미래를 지향할 것 같았던 90년대에도 베스트셀러의 첫 마당을 휘저은 것은 역사인물 소설류다.

'소설 동의보감' '소설 토정비결' '소설 목민심서' 는 이를 주도한 트로이카.

91년 최대의 베스트셀러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 은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정일품에까지 오르는 조선시대 명의 허준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전형적 출세담. 이어 92년 나온 이재운의 '소설 토정비결'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 도 2백만 부를 훌쩍 넘겼다.

역사적 사실을 간과한 채 소설적 상상력으로 지나치게 흥미 위주로 쓰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 이들 역사인물소설은 책 제목에 소설이란 수식어를 동원했다는 점과 모두 무명작가가 썼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세기말에 점점 가까워진 90년대 중반 이후 베스트셀러는 한 가지 정형보다는 사회의 다원화 만큼 다양화된 양상을 보인다.

세기말 퇴마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우혁의 '퇴마록' 은 컴퓨터 통신 연재물로 컴퓨터 통신망에서 많이 읽힌 소설이라도 책으로 나오면 큰 재미를 보지 못한다는 징크스를 깬 책. 94년 출간돼 지금까지 15권이 나왔고 17권까지 나올 예정인 '퇴마록' 은 판매부수 5백만 부로 20세기 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기웃거려 본 적도 없는 무명작가 김진명을 일약 초특급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 준 작품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77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타계한 과학자 이휘소 박사의 죽음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핵문제를 소재로 선택한 데다 남북 핵합작이란 상상을 초월한 결론으로 서점가를 강타했다.

또 90년대 후반 빼놓을 수 없는 베스트셀러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다.

무심코 지나칠 뿐 별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유적들을 꼼꼼히 답사하며 산하에 스민 역사의 자취와 선대의 숨결을 발굴하는 이 답사기는 그 자체로 새로운 문화창조란 평가를 받으며'았다.

특히 우리 사회가 서양으로 심하게 기울면서 잃어가던 민족 자존의 혼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았다는 의의와 함께' 인문서로 2백35만부가 나가는 돌풍을 일으켜 책의 역사에 당당히 자리매김을 했다.

20세기 베스트셀러 끝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윤희의 '잃어버린 너' 와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 도 판매부수 2백만 부를 넘겨 90년대 꾸준한 베스트셀러를 내온 여성작가들의 위력을 보여준다.

베스트 20에서는 밀려있지만 홍명희의 '혼불' (70만),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백만),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각각 70만)등이 여성 작가들의 베스트셀러 계보. '최근 불황에 허덕이는 출판계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박완서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 (18만),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 (28만)등은 여성작가들의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작가의 섬세함이 대중의 욕구와 맞아 떨어진 것" 이라며 "이런 수요가 당분간 계속돼 여성작가들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을 것" 으로 전망한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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