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부대 알바 뛰던 ‘하우스보이’오리건주 ‘小대통령’꿈 향해 돌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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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재미동포 1세 임용근이 미국 오리건주 주지사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 100년을 넘긴 한인 미국 이민사에 최초의 일이다. 소수민족 출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당찬 도전에 나선 것이다. 오리건주에서 활동한 그의 정치이력은 그대로 재미 한인 정치의 새 역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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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주지사 후보입니다.” 미국 오리건주 주지사 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임용근(73) 씨가 요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다. 영어 이름이 존 림(John Lim)인 그는 한인 이민 1세다.

인물탐험 - 한인 최초 미 주지사 도전 재미동포 임용근 #내 나이 74세… 큰 일은 경륜 많은 사람이 하는 것 교포2세들에게 꿈의 씨를 심고 싶어 나왔다

인종차별의 역사가 가장 짙었던 오리건주에서 ‘소수민족 중 소수민족 출신’인 그가 요즘 ‘정치혁명’을 꿈꾸고 있다. “내년 11월이면 주지사가 돼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신감에 넘쳐 있다. ‘제3차 세계한인정치인 포럼’(9월28일~10월 1일) 참석차 방한한 그를 10월5일 만나 주지사 출마와 관련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10월 초 이미 미 오리건주 주지사 공화당 예비후보 등록을 마쳤다. 미 오리건주는 내년 5월 공화당 공천 여부를 결정짓는 예비선거가 있고, 11월3일 본선을 치른다. 내년 11월까지 1년여 넘게 계속될 선거 대장정의 첫 걸음을 뗀 것이다. 한국인 최초로 미 주지사 도전이라는 새 역사를 그가 쓰기 시작한 것이다.

100년 역사를 넘긴 한인의 미국 이민사에서도 그의 주지사 도전은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공화당 소속인 그가 처한 주지사 도전 여건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지금 미국의 정치 판도는 거의 민주당 일색에 가깝다. 오바마 연방 대통령이 민주당 소속인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나아가 상하 양원, 주지사까지 모두 민주당이 다수를 지배한다. 그가 분석하는 그 이유는 이렇다. “부시 전 대통령이 이라크전을 오래 끌면서 4000여 명이 사망하자 반 부시 정서가 일어났다. 그것이 반 공화당 바람으로 연결됐다. 공화당원도, 소수민족도, 백인도, 흑인도 오히려 민주당을 더 지지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은 슈퍼 매저리티가 되었다.”

민주당 색깔이 오리건주에서는 더 짙어진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오리건주는 “완전 민주당 소굴”이다. 오리건주 주지사 자리는 민주당이 무려 24년째 독점하고 있다. 테드 클롱거스키 현 오리건주 주지사도 민주당 소속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는 요소로 삼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올해 들어 미국에서 반 공화당 정서가 점차 꺾이는 추세다. 오바마의 국민의료보험 정책이 큰 이슈인데 국민의 55~60%가 반대한다. 민주당의 세금 올리기 정책에 대해서도 국민의 거부 정서가 높다.” 그 이유를 미국 국민의 성숙한 민주주의 의식에서 찾는다.

“미국 국민은 정치가 특정 당으로 기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정치가 민주당 판이 되자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미국 국민 사이에 고개를 들고 있다. 국가라는 배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건주에서 주지사 자리를 두고 “민주당 물이 너무 오랫동안 고여 있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제 “뉴 아이디어를 가진 새 지도자가 나오기를 고대한다”는 것이다. 미국 국민의 정치적 균형감각이 되살아나면서 그에게 유리한 정치적 지형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근거로 그는 “(주지사 선거가 있는) 2010년에는 공화당 바람이 불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이런 조건들이 나의 주지사 출마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소굴’에서 공화당 깃발 들고 도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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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근 씨가 2007 오리건주 하원의원에 재당선된 뒤 주하원 개원식에서 의원선서를 하고 있다.
그는 흑인인 오바마 대통령 탄생도 자신의 출마에 나쁘지 않다고 해석한다. 7월 초 미국 연방최고법원 대법관에 라틴계 여성 소토마이어(Sotomayor, 스페인어 발음으로는 소토마요르) 판사가 임명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 들인다.

“미국에서 정치적 지지 여부는 피부 색깔이 아닌 인격과 실력의 문제임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미국 사람들이 이제는 확 깨어 있다는 말이다. 21세기는 소수민족이 세계적으로, 또 미국에서 동등한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는 스스로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낸 사람”으로 자부한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66년, 서른 살 때였다. 그는 44년째 미국에서 생활한 자신의 인생을 “30대에는 고생을 많이 했고, 40대에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뤘다. 50세부터 사회봉사를 시작했고, 55세에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지금은 미 주류사회 지도자로 우뚝섰다. 1992년 오리건주 상원의원으로 처음 등원하면서 미국정계에 입문했다. 한인 1세로는 최초였다. 그 후 같은 주에서 상원의원 3선, 하원의원 2선 등을 역임했다. 도합 5선의 기록이 보여주듯 그는 오리건주 정계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의 마지막 단계로 오리건주 주지사 도전에 나선 것이다. 그가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는 말 그대로 무일푼 신세였다. 그가 한국을 떠날 때 주머니에 있던 돈은 100달러가 전부였다. 나라 전체적으로 외화가 귀했던 때여서 그것이 최대 한도였다. “더 많이 허용했더라도 내게는 가져갈 돈이 더 이상 없었다”고 회고한다.

타고 가던 노스웨스트 항공편이 일본에서 하룻밤 머무르는 사이 그 돈마저 카메라를 사는 데 써버렸다. “그때 내 소원이 카메라를 갖는 것이었다. 왜 겁없이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도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미국에 도착해서도 그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70년 미국에서 신학석사(Western Evangelical Seminary)를 취득했다. 목사 자격은 있었지만 목사가 되지 않았다. 그가 목회를 하려면 미국에서 별도로 목사 안수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침례교·감리교 등 교단에서 교적을 옮길 것을 요구했다.

그는 한국에서 성결교를 다녔다. 그는 ‘성결교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 목회자의 길을 깨끗이 포기했다. 그가 목회자가 되었다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대신 사업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처음에는 ‘먹고 살기 위해’ 다른 미국 이민자가 그랬듯 그 역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청소부·페인트공·정원사 등이 그의 미국생활 초창기 직업 이력이다. 한 푼 두 푼 모아 식료품점을 시작으로 화장품·비타민 장사를 했다. 그 비타민이 그를 경제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데 결정적 영양소 역할을 했다. “뜻하지 않게 비타민이 잘 팔렸다. 나중에 비타민 도매업과 제조업까지 하게 됐다. 사업이 잘돼 돈을 많이 벌었다.”

1972년 설립해 지금까지 건재한 ARJ(American Royal Jelly Company)가 그것이다. 이어 1981년 부동산회사(Realty Resources N.W.)를 설립해 부동산업에 뛰어든다. 10년 동안 이 회사를 경영하면서 10건의 부동산을 가진 자산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부동산 수입으로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자선사업에 정치까지 하고 있다. 재정적 기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미국에서는 정치를 하기 힘들다.”

그의 미국 경험론이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은 서울에서 한 미국인 목사를 만난 덕분이었다. 자선단체 스완슨(Swanson)의 모건(Morgan) 목사가 바로 그다. 당시 그는 서울신학교(현 서울신학대학)를 8년 만에 졸업하고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서 능서교회를 개척하던 중이었다.

앞서 모건 목사가 1966년 6월 그에게 ‘고아 4중창단’을 이끌고 미국에 다녀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3개월 동안의 순회공연 후 정착한 곳이 미 오리건주 포틀랜드였다. 그는 “기회는 준비한 사람에게 항상 온다”는 생활 신념을 지금도 철석같이 믿는다. 그에게 미국 이민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늘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미에 앞서 그는 여주에 있던 미군 유도탄부대에서 5년간 군목으로 일한 적이 있다. 적지 않은 월급을 받아 생활도 안정됐고, 영어로 설교해야 했기 때문에 영어 실력도 부쩍 늘었다. 그랬기에 모건 목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주 상원의원 3선, 하원의원 2선 승승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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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근씨가 9월28일 열린 제3회 세계한인정치인포럼에 참석해 오리건주 주지사 출마 포부를 밝히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표현대로라면 ‘하나님의 섭리’였다. 1935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이 순탄치는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인 1951년 9·28 서울 수복 후 부친(임은규)을 잃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생활했던 3개월 동안 부역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됐다. 그 까닭에 그의 어머니(정서녀)와 6남매는 ‘빨갱이 집안’이라는 이유로 ‘국가적 누명과 정신적 가해’에 시달려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고등학교(여주농고)에 입학하면서 찾아든 ‘폐결핵’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 상황을 탈출할 비상구로 찾은 곳이 미군부대였다.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에 있던 미 8군 산하 9군단 본부였다. 그는 이곳에서 1년 가까이 노무자 겸 하우스보이로 일했다. 그는 미군부대에 취직한 목적의식이 분명했다. 첫째 영어를 배우기 위해, 둘째 잘 먹어 건강해지기 위해, 셋째 돈 벌어 못 받은 고교 졸업장을 받기 위해 등이었다.

이 세 가지 목적 중 건강 회복만큼은 이 미군부대에서 이루지 못했다. 성결교 계통인 서울신학교에 재학하는 동안에도 폐결핵은 그의 몸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6년여에 걸친 투병생활 중 도합 9차례에 걸쳐 각혈을 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이 때문에 4년제 신학교를 8년 동안이나 다녀야 했다.

그 기간을 그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고교 때부터 목표였던 영어 단어 7500개를 모두 암기했고 ‘죽음의 경지’를 경험하면서 인생의 가치관을 재정립했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7전8기의 오뚝이 정신을 체득한 것이다. 지난해 오리건주 하원의원 3선, 통합 6선 고지에 실패하고도 그는 정말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게 더 좋은 기회를 만들어줬다. 더 큰 도약을 위해 한 번 움츠린 것뿐이다. 주지사선거를 더 충실히, 치밀하게 준비할 수 있는 시간도 벌었다.”그런 그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미국 정계 입문 과정이다. 1990년 오리건주 주지사에 ‘느닷없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 배경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그 꿈은 나한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미국인 목사님으로부터 주지사에 나가보라는 복음을 받았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국 그 한마디 말이 씨가 되었다.”그해 그는 오리건주 주지사에 정말 출마하게 된다. 미국의 주지사는 한국의 도지사와는 위상이 전혀 다르다.

미국은 철저한 지방자치제로 주는 하나의 국가 같은 체제를 유지한다. 한국과 비교해 인구는 적고 국토는 더 큰 나라로 보는 것이 이해하기에 더 빠르다. 입법·사법·행정 등 3권분립 체제도 완벽하고, 그 중 행정부 수장이 주지사다. 연방 상원의원이 100명, 하원의원은 435명이지만 주지사는 50명으로 상대적으로 희소가치도 있다.

아들 부시, 클린턴 등 수많은 전직 대통령이 주지사 출신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 자리의 무게가 짐작된다. 그런 주지사 자리에 소수 민족 중 소수민족 출신인 그가 출마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때였다. 주변에서는 무모한 도전이라면서 ‘돈키호테’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래도 7명의 주지사 후보 중 두 번째로 많은 표를 받는 기염을 토했다. “정치라는 것은 하나의 계획이다. 당시 나는 꼭 되기를 원했지만, 된다고 믿은 것은 아니다. 우선 미국정치를 시험해 보고, 이름을 알리기 위해 나갔다. 그 점에서는 크게 성공했다. 그때 미국 사람들한테 좋은 이미지를 많이 심어줬다.”

그 말 끝에 그는 “첫 번째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 나가고, 두 번째는 당선되기 위해 나간다”는 ‘미국 정치 속담’을 소개했다.
그 속담 그대로 2년 후인 1992년 선거에서 속담대로 오리건주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민주당의 텃밭인 제11 상원의원 선거구에서 경쟁자와 59 대 41의 득표 비율로 대승을 거둔다.

그는 “운동화 5켤레가 다 닳도록 선거 유세를 벌였다”고 승인을 분석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세상은 도전하는 사람의 편이며, 도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있다”고 믿게 됐다.

그 이후 그는 앞서 말한 대로 오리건주에서 상원의원 3선, 하원의원 2선의 두터운 정치경력을 쌓았다. 의정활동도 눈부신 편이었다. 민사소송법 개혁, 복지제도 개선, 소수민족보호법 등 수많은 법안을 발의해 입법화했다. 오리건주 상원의원 시절 1992년부터 2000년까지 두 차례나 무역·경제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95년부터 2년 동안 오리건주 상원 공화당 원내부총무라는 당직도 역임했다.

절망하지 않는 오뚝이 정신 돋보여

그가 이런 성공을 거둔 데는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틀을 벗어나 미국 주류사회와 소통하고 적응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기 때문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도 역시 처음에는 ‘모든 것이 편한’ 한국교회에 다녔다. 그러다 “내가 미국에서 끝까지 한국인으로 살 것인가?” 고민하다 10년 만인 1975년 미국교회로 옮겼다.

리버크리스트 커뮤니티(Rivercrest Community) 교회였다. 2004년에는 신도회장을 맡을 만큼 이 교회에 35년 동안 다니면서 미국문화와 미국생활을 열심히 배웠다. 1990년 주지사 출마를 권유했던 미국인도 그 교회 목사였다.

“미국 이민자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끼리 어울려 사는 일이 흔하다. 한국교회에 나가고 동창회·향우회 등 온갖 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다진다. 나는 이를 ‘끼리끼리정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 당장은 편할지 모르지만 평생 미국 주류사회에는 편입할 수 없다. 내 뿌리는 한국인이지만 생활 터전은 미국이다. 미국인처럼은 못살아도 그들과 더불어 사는 노력은 꼭 필요하다.”

그는 “미국의 시민으로 사는 한 미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책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봉사활동도 ‘죽기살기로’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꼭 정계 진출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고 그는 말한다. 봉사활동은 머리로도, 몸으로도 할 수 있지만 가장 어려운 대목이 자기 돈을 쓰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이 가장 못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열심히 일해 성공한 한인이 적지 않다. 그런데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살면서도 현지인과 교류하지 않는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사회에서 한국,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썩 긍정적이지는 못하다.” 그는 번 돈에서 ‘거액’을 지역사회에 내놓았다.

이 기금을 주된 재원으로 1990년 존림장학회가 탄생했다. 그는 기금 관리에도 관여하지 않고 재단관리위원회에 맡겼다. 장학금 수여 대상도 굳이 한인이라고 못박지 않았다. 그는 “선거 유세를 하면서 지역을 돌 때 이 장학금을 받은 가족들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장학재단을 미국, 미국인을 위한 대표적 나눔 봉사로 여긴다. 그런 그의 생각을 미국인들이 잘 알고 받아들였기에 감히 주지사에 출마할 엄두를 낸 것이다. 내년 주지사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공화당 예선을 먼저 통과해야 한다. 후보자를 결정하는 예비선거는 내년 5월 당원들의 직접투표로 치러진다.

현재 출사표를 던진 오리건주 주지사 공화당 후보는 3명이다. 그를 포함해 주 상원 3선 의원인 애킨슨, 사업가 출신 엘렌 켈리가 그들이다. 후보가 더 많아지더라도 이들 세 명이 유력한 공화당 예선 경쟁자가 될 것으로 그는 예상했다.

“한 사람(엘렌 켈리)은 성공한 사업가이지만 정치경험이 없다. 또 한 사람(애킨슨)은 40대로 나이도 가장 젊은데 사업적 경험이 없다. 정치와 사업 어느 쪽이든 무경험은 주지사로서는 결격사유다. 나는 정치와 사업을 겸비한 사람이다.” 그 점이 다른 두 후보에 비해 그가 가진 큰 장점이라는 말이었다.

민주당 후보로는 두 사람이 부상하고 있다. 현직 주지사와 존 키츠하버 전 주지사다. 두 사람 다 무시하지 못할 인물이지만 키츠하버가 후보로서 더 유력하다는 것이 현지의 중평이다. 그는 두 번 주지사를 연임하고 2003년 물러났다. 3선 연임 금지 규정에 따라 8년을 쉬었다 이번에 3선 사냥에 나섰다.

주 상원의장을 8년간 지냈으며, 오바마 정부의 각료로도 거론됐을 정도로 오리건주에서는 정치 거물로 꼽힌다. 그만큼 버거운 상대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존 키츠하버가 민주당 후보가 된다면 오히려 내게 유리하다”고 호언한다. 24년 동안 주지사선거에서 공화당이 민주당에 진 것에 대해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극단적 보수파를 후보로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민주당원이면서 공화당 성향을 지닌 유권자가 10%쯤 되는데 이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화당원은 공화당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데 민주당원은 지지 성향이 훨씬 유동적이다. 민주당 후보를 이기려면 “민주당의 보수파를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이번에 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러려면 공화당 후보는 “중도적 공화당 사상을 가진 사람, 진보적 공화당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앞서 말한 세 명의 후보 중 자신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번 주지사선거에서는 ‘바꾸자(change)’는 캠페인 구호를 내세울 예정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외쳤던 바로 그 구호다. 공화당 후보도 그동안 ‘극단적 보수주의자’에서 새 인물로 바꾸고, 24년 지속된 민주당의 주지사 독점구조도 바꾸자는 것이다. 한 번 주지사가 되면 대부분 재선되는 미국 풍토에서 민주당이 32년 동안 주지사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킬 계획이다.

“이를 원하느냐고 나는 유권자에게 물을 것이다. 새 차가 나오면 새 타이어를 달아야지, 왜 헌 타이어를 장착하는가? 새로운 리더가 오리건주를 이끌어 가겠다고 한 내 메시지가 지금까지는 잘 먹혀들고 있다.”

그는 선거공약도 이미 준비해 놓고 있다. ‘3E 정책’이 그것이다. 3E는 경제(Economy)·교육(Education)·환경(Ecology)을 뜻한다. 그는 경제를 살리면 교육을 잘할 수 있고, 환경을 살릴 수 있는 돈은 자연스럽게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처럼 인위적으로 세금을 올리는 것에는 한사코 반대한다. 그것은 공화당의 기본 정책이기도 하다.

“나는 세 가지 정책에 초점을 맞춰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 여러 이슈를 언급하면 사람들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인종 따지는 유리천장은 이미 무너졌다”

그는 특히 오리건주의 경제 살리기에 자신이 적임자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자신이 사업가 출신이기도 하지만 주의회에서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경제통’으로 통했다는 말이었다. 오리건주는 미 서북부에 있는 주로 상대적으로 경제가 낙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를 나타내는 대표적 지표 중 하나가 실업률로, 한때 10~20%대를 기록했다.

그는 주의회에서 이 난제를 해결하는 데 주도적으로 역할했다고 자랑한다. 낙후지역을 중심으로 세금공제법안을 발의해 50개 경제특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지금은 철수했지만 2000년대 초반 하이닉스반도체가 오리건주 유진시에 투자했던 것도 그 덕택이었다. 이를 통해 오리건주에 일자리 창출을 많이 한 의원으로 오리건 주민들에게 각인돼 있다는 말이었다.

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마무리되면 그 혜택을 오리건주에 가장 많이 안겨줄 사람도 본인밖에 없다고 자신한다. 줄잡아 5000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리건주는 태평양에 접해 경제의 큰 부분을 무역에 의존한다. 한국은 물론 중국·일본·대만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다.

이 점에서도 여타 후보들과 비교해 경쟁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이번 선거에서 가장 큰 숙제로 여기는 부분은 선거자금 마련이다. 그는 이를 ‘근본문제’라고 표현했다. “내가 아무리 훌륭하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돈이 없으면 안 된다. 특히 미국사회에서는 그렇다. 무엇보다 알려야 하지 않는가? 선거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한데 한 사람을 움직일 때마다 모두 돈이 들어간다.”

그가 예상하는 선거자금은 본선 약 700만 달러(약 84억원), 예선 약 200만 달러(약 24억원) 가량이다. 오리건주는 우리나라처럼 법정선거비용 제한규정이 없다. 다만 지난번 주지사선거에서 후보마다 대략 그 정도의 돈을 썼다는 것을 근거로 한 액수다. “지금까지 선거를 치르면서 사업을 해서 번 내 돈을 많이 썼다. 지금도 얼마간 쓸 돈은 있다. 그러나 예상 선거 비용에는 턱 없이 모자란다.”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는 통칭 250만 명이다. 이들이 1달러씩만 기부금을 내도 250만 달러가 된다. 다른 계산법도 있다. 한 가정당 10달러씩 기부하면 100만 달러가 쉽게 넘어간다. 1000달러씩 1000명이 내거나, 100달러를 1만 명이 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는 탁상 위의 생각에 불과하다.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모든 동포가 기부금을 내주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동포들이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형편이 되는대로 조금씩이라도 도와줬으면 한다. 공화당 후보에 당선되기까지가 큰 고비다.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끝나는 것 아닌가? 여기까지만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한국 신문들이 적극적으로 밀어줘야 한다.”

그는 이런 기대감을 솔직히 내비쳤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현실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도 “소수민족 중 소수민족인 한국인이 어떻게 주지사에 나갈 수 있느냐?” “괜히 이름이나 내기 위해 나가는 것 아니냐”는 동포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동포의 흉중에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이와 완전히 반대다. 공화당은 흑인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며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존 매케인 같은 유명 인사가 그 흑인에게 형편 없이 깨졌다. 미국선거는 열려 있다. 인종을 따지는 유리천장은 이미 무너졌다. 문제는 호랑이가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다섯 번씩이나 당선됐겠나? 신호범·김창준의원 등도 모두 백인이 찍어 당선했다. 인종차별 때문에 미국에서 정치에 뛰어들지 못한다는 말은 더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세계가 새 사람을 요구한다. 그런 차원에서 나도 오리건 주민에게 강력하게 어필하려고 한다.”

그는 미국사회에서 한인 정치인이 꼭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사건을 예로 들었다. 그가 파악하는 사건의 성격은 “백인에게 당한 흑인이 분풀이를 한인에게 했다”는 것이다. “그때 한인이 어려운 일을 당했지만 우리를 대변해줄 정치가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당시 그가 내린 결론이다.

“우리 한인도 정치헌금까지 하면서 많은 정치인을 도왔지만 우리가 꼭 필요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도 한인 정치가를 만들자는 자각을 새롭게 했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한인에게는 몸에 와 닿지 않는 분위기다. 정치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풍토가 여전한 것이 그 증거다. 연방 하원의원으로 2~3명, 상원의원으로 1명 정도 있으면 우리 밥그릇을 제대로 찾아 먹을 수 있다.”

그의 주지사 출마는 한국에서도 큰 관심의 대상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그의 출마 이야기를 듣고 “잘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손을 잡고 ‘파이팅’까지 외쳐 주었다.

5월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한 그를 면담하는 자리에서였다. 그는 내친 김에 이 대통령이 적당한 시기에 기회가 되면 오리건주를 한번 방문해 주기를 기대하는 말을 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에게 한인 출신 주지사 탄생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해주면 힘을 결집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뜻을 청와대 관련 비서관에게도 전했다.

미국에서 한인 정치인이 꼭 필요한 이유

9월28일부터 4일간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제3회 세계한인정치인포럼’에서도 화제는 단연 그의 주지사 출마 이야기였다. 재외동포재단(이사장 권영건)이 주최한 이 포럼에는 김창준 전 미 연방하원의원, 국제한인변호사협회 명예회장 김홍기 변호사 등 50여 명의 한인 정치인과 김형오 국회의장, 박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 등 국내 관련 인사 3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그의 주지사 당선을 위해 힘을 모으자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이 포럼을 주관한 세계한인정치인협의회는 2007년 그가 창립을 주도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회장을 맡고 있다. 1988년 미국 워싱턴DC에서 최초로 열린 세계한민족대회도 그가 조직한 것이다. 그가 미주한인회 총회장을 할 때 주변의 회의적 반응을 물리치고 자비를 써가면서 33개국 대표를 초청해 성사시켰다.

올해로 8회째를 맞는 세계한상대회(10월27~29일, 인천 송도컨벤션)도 알고 보면 그의 작품이라 할 만하다. 세계한상대회는 1990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인상공인대회가 모태가 되었는데, 이 행사도 그가 앞장서서 이끌었다. 오리건주는 미국에서 아직까지 소수민족이 상대적으로 적은 주다.

오리건주 헌법에 흑인은 살 수 없다는 조항이 오랫동안 존재했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 난 사람도 살 수 없었다. 그 조항이 사라지면서 소수민족 비율이 상당히 높아졌다. 그래도 20% 수준이다. 흑인이 10%, 라틴계가 7%쯤 차지한다. 동양인을 다 합치면 3% 안팎이다.

“오히려 소수민족이 많은 데서는 소수민족 출신 후보가 당선되기가 더 힘들다. 소수민족끼리 이해가 다르고 서로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소수민족에 기대기보다 미 주류사회에 들어가 승부를 가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고 소수민족 유권자를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백인표를 얻어야 당선이 가능하다. 거기에 소수민족 표를 1~2%라도 더 받는 것이 당락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그런데 소수민족은 투표율이 무척 낮은 편이다. 백인의 투표율은 60~70%인 데 비해 한인의 투표율은 대략 그 절반 수준이다. 라틴계는 아직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 편이다.

“선거에서는 한 표 한 표가 모두 소중하다. 소수민족은 같은 소수민족인 나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한인 동포들이 소수민족 유권자 한 사람이라도 더 투표장에 나오도록 전화 한 통이라도 해준다면 그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공화당·민주당 따지지 말고 일단 한인이 주지사로 나가는 것을 지지해 달라. 한국인이 한국인을 안 도우면 누가 돕겠는가? 이는 절실히 필요한 부분이다.”

재미동포에 자부심 심는 계기

그는 자신이 주지사가 된다면 소수민족에게는 좋은 의미의 정치적 쓰나미가 될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없어져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된다는 점에서다. 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동포에게는 새로운 자부심을 갖도록 해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리건주에서 1월13일은 한국의 날이다. 2007년 내가 주도해 법으로 제정했다. 또 오리건주에 사는 아시아인을 위해 주지사 산하에 아시아자문위원회도 만들었다. 아시아인이 직면한 어려운 문제는 이곳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창구를 단일화한 전담기구다.”
미국 현지에서 그를 두고 나이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올해 만 74세다. 이런 말을 스스로 먼저 꺼내고는 준비한 듯한 답변을 했다. “성서에 보면 유대의 기본 헌법을 만든 모세를 80살에 하나님이 불렀다. 레이건 대통령이 재선될 때나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될 때 70대였다. 역사적으로 큰일은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사람이 더 많이 했다. 내년 선거에서 나이가 화제는 될 수 있지만 메이저 이슈는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경륜을 인정받아야 한다. 나이 때문에 출마를 망설일 이유가 없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나는 조금도 약점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주변에서 나이에 비해 “젊게 산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그런데 덧붙이는 말이 재미있다. “젊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를 대면했을 때 7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젊어 보였다. 젊었을 적 폐결핵을 않을 때 “50살까지만 살면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그였다. 그 비결을 묻자 “열심히 사니 건강해지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1주일에 한 번씩 반드시 등산을 다닌다.”

그는 이번 출마를 ‘20년 만의 꿈을 이루는 도전’으로 스스로 규정한다.

“많은 사람이 내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드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이번 도전에 나섰다. 20년 전 그때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였지만, 이번에는 주지사가 되기 위해 나가는 것이다. 내 개인적 영달을 위한 출마로 생각하지 말아 달라. 250만 재미 동포의 꿈과 염원이 여기에 담겨있다. 재미동포가 일심단결해 한번 밀어 달라.”

그리고 그후 그가 꼭 하고 싶은 마지막 숙제가 한 가지 더 있다고 말했다.

“재미동포 1.5세, 2세들에게, 또 한국의 청소년에게 유에서 무를 창조한 꿈의 씨를 심어주고 싶다. 내가 미국 정계 진출의 꿈을 남에게서 받았듯 꿈은 이렇게 전수되는 것이다.”

글 윤석진 월간중앙 편집위원 [grayoon@joongang.co.kr] 사진 오상민 월간중앙 사진기자 [o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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