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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 도전현장] 5. 美 '사이버전'도 고지 선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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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이 수십명의 전문 해커를 동원해 미국의 주요 컴퓨터망에 침투했다. 미국 내 주요 도시의 전기선과 911 응급전화선이 차단됐다. 미 국방부의 36개 대형 컴퓨터에도 침입, 지휘부의 명령하달 통로를 막아버렸다. 일부에선 명령내용을 왜곡시켜 일선에 전달 중이다. 도시는 공포로 가득하고 전선의 각 부대도 대혼란에 휩싸인다…. 미국의 사이버전쟁 통합사령부 브라이언 휘튼 대위가 설명한 가상 시나리오의 일부분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정보화 추세로 볼 때 이같은 상황은 결코 가상이 아닙니다.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현실상황' 입니다. 대비하지 않는다면 끝장입니다. 걷잡을 수 없는 혼란. 그걸 상상해 보십시오. " 지난 10월 8일 오후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크항의 미 대서양사령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과 헨리 셸턴 함참의장을 비롯, 양 어깨에 별을 줄줄이 단 30여명의 미군 장성들이 연병장 단상에 자리를 함께 했다. 이미 시작된 사이버 전쟁' 에 본격 대비하기 위한 새 체제가 출범되는 역사적 자리다. 별들의 얼굴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미 우주사령부가 사이버전 수행의 총책을 맡는다. 노포크항의 대서양사령부는 '새 임무' 를 위한 통합사령부로 개편됐다.

적의 사이버 습격이나 화생방 공격 때 민간기구들과 대처방안을 조율하는 게 통합사령부의 주임무. 브라이언 대위는 "사이버 공격에 대비한 방어가 1차 목표다. 모든 가능성을 놓고 시뮬레이션을 되풀이하며 물샐 틈 없는 방어망을 구축할 것" 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특별팀의 일원이다.

"물론 우리도 가상 적을 교란시키는 노하우를 축적한다. 앞으로의 전쟁은 포성이 터지기전 컴퓨터게임으로 승패가 가려질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대위는 기자에게 사이버전에서의 우위가 군사적 우위를 판가름하는 시대라고 강조했다.

기념식에서 셸턴 합참의장은 "지난 코소보 공습시 미국은 유고의 방공망을 교란하기 위한 사이버 공격을 시도한 바 있다" 고 털어놓았다.

그리곤 "내년 10월까지 미국의 사이버전 수행을 수비위주에서 공수(攻守)를 겸한 형태로 전환하겠다" 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36명의 정예들로 구성된 특별팀이 지난 1년간 준비작업을 맡아왔다고 처음으로 공개했다.

미 국가보안국(NSA)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사이버 전쟁 기술개발에 나선 국가들은 1백20여개국. 이 가운데 23개국이 미국을 가상 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미국이 연간 28억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사이버 전쟁 대비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4월 16일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시의 포드 대통령 기념관에 모인 역대 미 국무장관과 안보보좌관들은 온종일 미국인들이 국제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투정이었다.

브레진스키 박사도 그중 한사람. 연설대에 오른 그는 자신의 저서 '거대한 장기판' (Grand Chessboard)에서 지적한 내용을 토대로 세계정세를 풀어갔다.

"미국의 관점에서 세계는 하나의 장기판이다. 전략적 요충지는 선점해야 한다. 한번 밀리면 끝이다. 미국이 힘의 절대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선 유라시아를 '정복' 해야 한다. "

국무부와 백악관에서 미국의 세계전략을 주무르던 사람들이 모인 자리인 탓인지 그의 발언은 군더더기 부연설명이 없었다. 그런데도 참석자들은 그의 말에 절대적인 공감을 표시했다.

미국은 현재 명실상부한 세계의 유일 초강국이다. 미국 스스로도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 각종 보고서가 이를 뒷받침하며, 특히 국방비 규모만 봐도 그같은 의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전세계의 국방예산 총액은 지난 한해 7천8백50억달러. 이 가운데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36%다. 냉전기였던 10년 전의 30%에 비해 오히려 늘어났다. 2000년도 미 국방예산은 2천5백66억달러로 책정됐다. 99년도에 비해 13억달러가 증가됐다.

미국이 적성국으로 간주하는 무법국가(rogue state)들과 러시아.중국의 국방비를 합친 1천80억달러는 이 액수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세계를 움직이는 막강한 아폴로상(像) 미국의 행태에 대한 우려가 미국 안팎에서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과연 고립주의로 회귀하는가" 란 질문이 국내에서 들려오는 것이라면 "미국의 행태가 너무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것이 아닌가" 란 반발은 바깥에서 제기된다.

지난 10월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의 비준을 미 상원이 부결한 것을 계기로 미국의 고립주의 회귀에 대한 우려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그러나 CTBT 비준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주장에는 미국의 군사적 절대 우위가 다른 국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오만이 서려 있다.

경제통합에 이어 정치통합을 향해가는 유럽연합(EU)이 유럽독자방위군 창설에 합의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미국의 독주를 견제할 이렇다 할 대안을 갖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물리적 힘의 우위를 굳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전략의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틀을 짜려고 고심하는 모습은 미 정부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 정책연구기관의 활동을 통해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냉전종식 직후부터 이미 시작된 미국의 21세기 세계전략 구상은 대통령 지시에 따른 특별위원회나 의회 지원아래 초당적 인사들이 참여해 작성한 각종 문건을 통해 드러난다.

이들 보고서에는 유럽의 통합 움직임, 중국과 러시아의 밀착에 따른 옛 사회주의권의 결속 추세 등에 어떻게 대처하면서 국익을 극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짙게 깔려 있다.

현재 미국이 가장 이상적 형태로 보는 국제질서의 모습은 유일 초강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상에 기초해 여타 경쟁상대들과의 공존을 통해 안정을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아울러 국제문제에 개입하는 미국의 군사적.재정적 부담을 덜기 위해 이들 국가 혹은 집단에 나름대로 부담을 공유토록 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은 새 밀레니엄에서도 군사.외교적으로 영원한 슈퍼파워로 남겠다는 꿈에 불타고 있다.

워싱턴=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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