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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넘어 대결에서 대안으로] 17. 신자유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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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중앙일보가 밀레니엄 기획의 일환으로 경남대(총장 박재규)와 공동으로 엮는 '세기를 넘어' 시리즈의 열일곱번째 주제는 '신 자유주의' 다. 경제의 효율성과 시장에서의 경쟁을 최고의 선(善)으로 여기는 신 자유주의는 새로운 세기를 앞둔 지금 국경을 넘어선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런 만큼 신 자유주의 이념은 현재 생산양식은 물론 생활양식에 커다란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사회.경제적인 불평등과 함께 사회공동체를 해체하고 있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강대국의 패권적 이해를 보호하는 논리가 되고 있다는 비판도 이같은 변화가 가져온 부정적 결과를 암시한다. 아울러 최근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를 요구하는 등 자본주의를 갱신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신 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배경.성격과 아울러 그 전망을 짚어본다. 편집자

지난 6월 18일 오전 9시. 영국 런던의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는 '시티' 에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평소 짙은색 정장이 지배하던 거리에 울긋불긋 온갖 복장을 한 군중이 모여들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 인간 사슬처럼 손에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덩실덩실 춤추는 사람들. 카니발 같았다.

그러나 축제는 곧 시위로 바뀌었다. 3천명쯤이 모이자 런던 브리지와 주위 빌딩 등 대형 건조물의 벽들엔 '신 자유주의를 반대한다' '지금의 세계 금융 시스템엔 미래가 없다' 는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를 신호삼아 군중은 트래펄가 스퀘어와 리버풀가 등 시내 주요 거리를 차단하고 네트웨스트.리요드 은행 등 일부 금융기관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경찰과의 충돌이 빚어졌다.

시위대는 "신 자유주의를 축으로 한 자본주의 시스템이 소수 부자들의 배를 불리려고 지구 환경과 인간을 착취해 사회.환경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은 독일 쾰른에서 열린 G8(서방선진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의 개막일이었다. 그러나 시위대에 이날은 '세계화한 경제와 국제금융의 심장부에서 펼치는 행동과 저항.축제의 날' 혹은 '6.18 국제 행동의 날' 이었다. 시위는 영국뿐 아니라 미국 월 스트리트.이스라엘 텔아비브 등 전세계 65개국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지구촌의 6백여 비정부기구(NGO)는 인터넷에 띄운 제안문에서 "오늘 시위는 초국적 자본의 횡포를 고발하고 전 지구적인 항의의 뜻을 표하기 위해 국제적 연대를 통해 마련됐다" 고 밝혔다.

이 사건은 국제 경쟁력과 기업의 효율을 가장 중시하는 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빠른 속도로 전 지구에 퍼져 나가면서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의 활동도 날로 드세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경제적 평등을 침해하지 않는 시장의 자유를 주장했던 고전적 자유주의(17~18세기)와 달리 신 자유주의는 시장의 완결성에 절대적 신뢰를 보낸다.

신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철학은 '개인은 경쟁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고 인간 이성에 의한 합리적 계획은 도그마' 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을 현대적으로 집대성한 사람이 국제 금융투기꾼 조지 소로스가 그렇게 존경해 마지 않는 칼 포퍼였다.

이는 곧 시장에 대한 완전성 테제로 귀결된다. 신 자유주의 사상의 토대를 놓은 대표적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국가 개입의 최소화와 시장 자율기능의 확대" 를 주장, 레이건 대통령 때 미국이 시장 중심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에 앞서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는 일찍이 "시장경제의 자생적 질서를 인위적인 것으로 대체하려면 정부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으며, 이렇듯 막강한 힘을 지닌 정부는 독재주의와 전체주의로 변할 수밖에 없다" 고 주장해 신 자유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하이에크가 그랬듯이 80년대에 본격 등장하기 시작한 신 자유주의가 타킷으로 삼았던 것은 케인스식 정부 개입, 혹은 복지국가였다. 아울러 미국 보수파들이 보여줬던 것처럼 이미 붕괴하기 시작한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요인도 개입했다. 제프리 하코드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70년대 이후 자본의 경쟁이 자본의 과잉축적을 일으킴에 따라 생산성은 저하되고 이윤율이 하락됐다. 이런 상태에서 케인스의 개입주의적 복지국가에 대한 경제적.도덕적 비난이 모아졌다. 케인스가 비록 40년대 전후에는 '국가 중심적 개혁주의' 를 지향했지만 그 결과는 '인민 대중의 수동성' 과 함께 정부 규제→비효율성→경제성장 둔화로 이어졌다. "

80년대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 등 보수정권에 권력이 넘어감으로써 '작은 정부, 큰 시장' 은 정책으로 구체화된다. 시장의 자율기능을 확대하기 위해 규제는 없애고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것은 물론 '공공재(公共財)' 라는 개념을 무시했다.

이같은 신 자유주의는 70, 80년대에는 미국에서 득세했던 정치적 신 보수주의와 결합하기도 했다. 당시 보수주의는 '이성보다 전통과 가족을 신뢰하고 인간의 우월성과 열등함 사이의 차별을 인정하는 것' 으로 요약된다.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만난 세계적인 사회학자 알랭 투렌 교수는 "미국에서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공동체주의마저 결국 신 자유주의일 뿐" 이라고 단정한 것도 이런 맥락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90년대 들어 신 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세계화' 됐다.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IMF)이 최전선에서 미국의 패권을 세계 곳곳에 전달하는 전령사 역할을 하고 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코소보 침공에서 보듯 어떤 이유로든 그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언제든 새로운 무기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사회 비판가인 노엄 촘스키 교수는 "신 자유주의는 벌거벗은 이익집단의 궤변에 불과한 '종교' 이자 지구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됐다" 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역설을 낳고 있다. 93년 우루과이 라운드의 타결과 함께 경제적 국경이 허물어진 만큼 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보여주듯 국지적인 시장 불안이 세계 시장으로 확산될 위험이 크게 늘었다. 나아가 국제적 규제가 없어 국가간.지역간의 차등 발전과 빈부격차가 심화하는 것도 세계 경제의 불안정을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연방법원은 마이크로 소프트(MS)사에 독점 판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미 펜실베이니아 밀러스빌주립대 이만우 교수는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던 신 자유주의의 결과를 인식하고 그에 대해 자기 경고를 한 것이 아니겠느냐" 고 풀이한다.

신 자유주의가 강력한 만큼 그에 대한 저항도 피할 수 없게 됐다.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실업과 저성장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빈곤의 축적과 인간성 상실만을 초래한다는 비난과 함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 이는 곧 95년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득세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거센 비판과 견제 움직임이 노골화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로니컬하게 신 자유주의의 파고는 더욱 높아만 가고, 아직 대안 체제는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 또한 신 자유주의에 다름 아니며, 기존 좌파를 갱신한 '쇄신 좌파' 가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엇도 신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신 자유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일까. 그 대답은 신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경제적 효율과 적자생존 법칙이 인간의 삶의 질을 얼마나 향상시켜 줄 것인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런던.뉴욕〓심지연(경남대.정치학).김위생(경남대.경제학)교수, 김창호.유권하 기자, 신중돈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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