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틴은 남자 친구 집에서 그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접시 위엔 그녀가 남자 친구의 부모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만들어온 케이크 조각이 놓여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게 잘 돼가고 있지만, 며칠 전 집시 노파의 저주를 받아 종종 불길한 환영과 정체불명의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 크리스틴은 내심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신경 거슬리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케이크 조각 가운데가 꿈틀꿈틀한다. 조심스럽게 포크로 케이크를 헤치자 그 속에 집시 노파의 눈알 하나가 나타나 희번덕거리며 그녀를 노려본다! 크리스틴은 비명을 삼키며 포크로 케이크를 내려찍는다.
문소영 기자의 대중문화 속 명화 코드 : 공포영화 감독들의 우상, 마그리트
이것은 지난여름 개봉했던 샘 레이미 감독의 ‘드래그 미 투 헬’의 한 장면이다. ‘이블 데드’ 시리즈로 공포와 블랙 유머가 뒤섞인 독특한 호러무비 세계를 구축한 레이미의 재치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선대 초현실주의(Surrealism) 미술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바로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 말이다. 그의 ‘초상화(1935)’라는 작품을 보면, 지극히 일상적인 테이블에 팬케이크가 담긴 접시가 하나 놓여있는데, 그 팬케이크 한가운데 눈 하나가 떡 하니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게다가 그 옆에 뒤집혀진 포크는 왠지 모를 무시무시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아마도 마그리트는 공포영화 감독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오컬트 공포영화의 걸작 ‘엑소시스트(1973)’의 포스터는 악령을 전면에 드러내는 대신 어둠에 싸인 집과 이상한 빛을 내는 창문과 가로등과 퇴마사 신부의 실루엣으로 신비롭고 불길한 분위기를 물씬 풍겨서 명성이 높은데, 이 포스터는 바로 마그리트의 대표작 ‘빛의 제국’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한성필의 사진작품(사진1)에서 벨기에의 마그리트 박물관 공사현장을 가린 가림막 가운데에 그려진 그림이 바로 ‘빛의 제국’이다. 이 그림에서 하얀 뭉게구름이 떠있는 위쪽의 푸른 하늘은 분명히 햇빛 가득한 낮의 하늘인데, 아래쪽에 있는 집과 나무는 그 햇빛을 전혀 받지 않는 밤의 상태에 있고 가로등과 실내등까지 켜져 있다. 이 그림에 영향을 받은 영화는 ‘엑소시스트’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의 공포 스릴러 영화 ‘검은 집(2007)’의 경우에는 신태라 감독이 미술팀에 이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런 분위기로 ‘검은 집’ 세트(사진 2 포스터 아랫부분 참고)를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뿐인가. 지난해 할리우드 영화 ‘미러(2008)’로 리메이크돼 화제가 된 한국 공포 스릴러 영화 ‘거울 속으로(2003)’의 김성호 감독은 마그리트의 그림 ‘재현되지 않는다(1937)’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그림에서는 한 남자가 등과 뒤통수를 보이며 거울 앞에 서 있다. 그런데 거울에는 그 남자의 얼굴이 비치는 대신 똑같은 뒤통수가 다시 비친다. 여기에서 거울 속의 자신이 사실 자기자신이 아니며 거울 속의 세계가 이 세계의 반영이 아닌 독립적인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영화의 착상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그리트가 공포영화 감독들에게 많이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빛의 제국’을 보자. 이 그림에서 하늘 부분과 집 부분을 따로따로 봤을 때는 그로테스크하거나 환상적인 데라고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 두 가지가 공존하면서 이 평범하고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변모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데페이즈망(d<00E9>paysement) 기법이다. 어떤 대상을 상식적인 환경이 아닌 이질적인 환경으로 옮겨 모순되는 것과 결합시키거나 크기와 배치를 왜곡해서 기이한 느낌을 주는 기법을 말한다.
특히 마그리트의 경우에는, 살바도르 달리 같은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개개의 사물 자체를 기괴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표현한 것과 달리, 개개의 사물은 덤덤하고 일상적으로 표현하되 이것들을 엉뚱하게 배열하거나 서로 결합해 더욱더 충격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다가올 때, 이를테면 늘 보던 거울의 이미지가 제멋대로 움직일 때, 섬뜩한 신비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점이 공포영화 중에서도 귀신이나 선혈이 낭자한 장면에 의존하기보다 일상에서 갑자기 닥치는 공포를 창의적인 비주얼로 보여주려 하는 영화들에 많은 영감을 주는 것이리라. 게다가 마그리트가 주는 섬뜩함은 혐오스러운 공포와 달리 흥미로움과 쾌감을 동반한 것이다.
‘빛의 제국’의 경우 사실 나는 이 그림이 무섭다기보다 재미있다. 하지만 한 예민한 지인이 이 그림이 혼자 보기에는 너무 무서운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다시 물끄러미 본 적이 있는데, 그 점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햇빛에도 불구하고 밤에 머물러 있는 저 집은 어둠의 절대적인 본질이며 주변을 물들이는 그런 존재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엑소시스트’ 포스터와 ‘검은 집’ 세트에 영감을 준 것이리라.
하지만 마그리트의 작품은 기발함의 쾌감이 공포를 압도하는 경우도 많고 이런 경우에는 광고에도 많이 이용된다. 그리고 그의 데페이즈망은 현대 미술가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상하이 Contemporary 아트페어에서 본 쿠바 출신 작가 호르헤 마옛의 설치미술 작품(사진3)은 마그리트 그림의 3차원 후계자라고 할 만하다.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된 나무 미니어처가 직사각형의 투명한 공간 안에 거꾸로 떠 있어서 신비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또 한성필의 사진작품은 ‘빛의 제국’이 그려진 마그리트 박물관 공사장 가림막을 그림 속의 가로등과 흡사한 그림 밖의 가로등과 함께 찍어 평면의 사진으로 재현함으로써, 그 가림막의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또 하나의 신비로운 가상세계를 창조했다. 이 가림막은 박물관이 지난 5월에 문을 열면서 아쉽게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으나 이 사진작품으로 지속된 생명을 부여받게 되었다.
중앙데일리 경제산업팀 기자. 일상 속에서 명화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며, 관련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