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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나무 그릇 위에 사과와 더덕, 금귤로 손수 만든 정과를 가지런히 올린다. 장식은 근처에서 뜯어온 담쟁이 잎. 선명한 초록색이 테이블에 활력을 준다. 매실차는 컵에 담아 삼베로 만든 조각보 위에 얹는다. 척 봐도 예사롭지 않은 테이블 세팅. 30~60대 다섯이 둘러앉는다. 나이의 경계를 허물고 이들을 격없는 친구로 묶은 연줄은 테이블에 답이 나와 있다. 바로‘자연주의’다.

패션디자이너 두 명, 요리연구가 한 명, 종이조각가와 조각보 작가가 각기 한 명. 구성원의 면면이다. 그들의 음식과 살림, 바느질과 옷은 ‘자연’을 구심점으로 10여 년간 푸릇푸릇한 조화를 이뤄왔다.

자연주의 패션 브랜드 ‘이새’의 정경아(42)대표가 애초에 이 모임을 주도했다. 대학교 시절부터 천연염색에 관심이 많았고, 한때 문화역사기행팀을 운영할 정도로 조상들의 전통과 문화를 찾는 일에 열심이었다. 4년 전부터는 자연소재 옷 브랜드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새의 옷은 자연친화적인 소재를 쓰는 만큼 촉감이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전세계 농약의 1/4이 목화재배에 쓰인다는 걸 아세요? 그에 비해 저희는 비료와 살충제가 없이도 잘 자라는 케나프 섬유를 쓰고 있어요. 케나프는 선진국에서 면의 대용품으로 무척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물이지요.”

김학경(43)씨는 정씨와 문화역사기행을 함께 하며 친해진 요리연구가다. 김씨의 원래 직업은 간호사였다. 어릴 때부터 우리 음식 만드는 일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던 김씨는 병원업무와 요리수업을 병행했다. 결국 궁중음식연구원의 한복려 원장 밑에서 떡 만드는 일을 배워 요리연구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금은 한국발효음식과 정과·한과에 주력하고 있다.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드는 정과는 요즘 잘안 만드는 전통과자예요. 싱싱한 식재료를 쓰기 때문에 요즘 과자처럼 먹고 속이 안 좋거나 하지 않아요.” 정과로 잘 쓰이지 않는 무나 서리태 콩가루를 묻힌 더덕 정과를 만드는 등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기도 한다. 김씨의 요리를 맛본 친구들은 이제 다른 음식은 성에 차지 않는다며 투정 아닌 투정이다.

모임의 맏언니는 공예디자인 작가인 황정자(67)씨다. 꽃꽂이부터 자연염색, 조각보 만들기와 테이블세팅은 물론 공예디자인까지 섭렵, ‘살림의 여왕’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우리 어머니가 참 꼼꼼한 분이셨어요. 음식물쓰레기는 일일이 말리고, 기름 한 방울조차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는 옛날 분이셨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황씨의 진면목은 살림 구석구석에서 빛이 난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올 만큼 정리가 잘 되어 있다”는 게 정씨의 증언. “냉장고 냄새의 원인인 습기를 없애기 위해 칸마다 매트를 직접 만들어 깔았다”는 말에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를 건넨다. “며느리가 참 힘들겠어요. 아하하.”

또 옛 느낌이 살아 있는 누비와 모시·삼베등을 이용해 현대적 감각의 조각보를 만드는 작가 박태현(42)씨가 있다. 그의 조각보는 요리·리빙·패션을 아우르며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어 회원들 사이에서 인기다.

커피 찌꺼기로 의류와 소품을 염색하는 윤정연(30)씨는 이 모임의 막내다. 베이지색 부터 갈색까지 다양한 그의 염색은 부드러우면서 은은하다. 옷은 물론이고 한지에도 염색을 한다. “커피를 너무 좋아하다보니 커피찌꺼기와 커피를 거르는 종이 필터가 처치곤란이었어요. 고민하다 시작한 게 커피찌꺼기 염색이었죠.”

모임은 자연스럽게 환경 이야기로 이어졌다. 박씨는 “요즘은 물을 물처럼 쓴다”고 일침을 놓았다. “우리 어머니는 세숫물도 그냥 안 버리고 따로 받아 화단에 물을 주곤 했다”는 김씨의 말을 황씨가 받는다. “나 어릴적에는 물을 아끼면 용왕님이 복을 주고, 불을 아끼면 산신령이 복을 준다는 말이 있었죠. 내가 만든 물과 불이 아닌데, 좀더 아끼고 나누며 사는 지혜가 필요해요.” 자연에 관한 얘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봇물처럼 터진다.

모임 말미 정씨가 한 마디 건넨다. “한국의 전통과 자연을 추구한다는 공통점. 또 건강한 음식과 삶에 관해 얘기하며 함께 지내는 세월이 길어졌더니 어느새 서로 닮아가더군요.” 왁자지껄, 두서 없어보이는 수다 속에 묘하게도 일체감이 느껴지는 건 우연이 아닌 듯 했다.

[사진설명]커피찌꺼기로 염색한 옷을 만드는 윤정연 디자이너, 조각보 박태현 작가,종이공예 황정자 작가,김학경 요리연구가, 친환경 브랜드 이새 정경아 대표(왼쪽부터). 먹는 것부터 입는 것까지, 이들이 한번 모일 때마다 행복한 자연주의 라이프가 완성된다.

< 이세라 기자 slwitch@joongang.co.kr >

< 사진=김진원기자jwbest7@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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