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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로씨 수기 독점게재]6.어머니,미움을 넘어섰어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창 너머로 몰려오는 일본경찰들을 바라보면서 야쿠자 2명을 죽인 것은 시작일 뿐이지 본격적인 '전쟁' 은 지금부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즉시 1층 현관 쪽으로 내려가 지휘본부가 설치된 시즈오카 (靜岡)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오하시 아사타로 (大橋朝太郎) 순경을 데리고 오라. "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오하시 순경을 맨 처음 부른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가 '가네도키 (金時)' 라는 작은 대폿집을 경영하고 있던 가케가와 (掛川.시즈오카현의 소도시) 의 파출소 말단순경인 그는 종종 가게로 술을 마시러 오곤 해 우리 가족과는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사건 전날 나는 가케가와 파출소로 엽총을 들고 찾아가 "수일내로 야쿠자는 물론 시미즈의 일본경찰들과도 한판 붙을 생각" 이라고 불쑥 말을 꺼냈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듣고 있던 오하시는 내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자 "희로짱 (권희로씨의 애칭) , 제발 참게나" 라고 만류했다.

그때 내가 왜 오하시 순경을 찾아갔는 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내가 엽총을 들고 찾아온 사실을 본서에 고하지 않고 묵살해버렸다.

방탄조끼를 입은 오하시 순경이 찾아왔다.

후지미야 여관에서 농성을 시작한 이후 맨 처음 찾아온 '손님' 이었다.

방문 앞에 선 오하시는 "희로짱, 와시와 나니모이엔요 (희로,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해)" 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내뱉는 오하시 순경의 심정을 나는 알았다.

사건 전날 엽총을 들고 찾아 갔을 때 경찰 신분상 '총도법 (銃刀法) 위반' 으로 체포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개인적 친분 때문에 눈 감아버린 것이 마음의 부담이 됐던 게 분명했다.

"오하시상, 설마 내가 당신 몸에 총알이라도 박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라고 말하자 그는 "위에서 시켜 어쩔 수 없었네. 지금이라도 방탄조끼를 벗겠네" 라고 대답했다.

나는 오하시 순경과 잠시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경위.심정 등을 이야기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 뒤 실로 많은 사람들이 여관 안으로 들어와 나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날짜별로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떤 사람이 들어와 대강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하고 있다.

당시 도쿄에서는 언론보도를 통해 이 사건의 배경에 민족차별 문제가 깔려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많은 일본인, 재일 한국인 지식인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모임 같은 것을 만들었다.

수백명의 지식인이 그 모임에 참여했는데 그중 네댓명이 대표자격으로 후지미야 여관에 찾아왔다.

내 기억으로는 변호사인 야마네 지로 (山根二郎).스나미 스케 (角南しゅんすけ) 씨와 주오 (中央) 대 이토 나루히코 (伊藤成彦) 교수, 그리고 재일한국인 작가인 김달수 (金達壽) 씨 4명이 찾아왔던 것 같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절대 죽으면 안됩니다.

살아서 재판을 통해 무슨 문제가 있는 지, 일본 사회의 왜곡된 모습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라고 말하며 재판이 시작되면 전면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며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들 중 김달수씨는 나를 끌어안고 "앞으로도 이런 사건은 끊이지 않을거요. 그때마다 우리 동포는 희생자가 될겁니다" 라며 비통하게 흐느꼈다.

기자들 중에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細川護熙) 전 일본총리가 나와 함께 하룻밤을 지낸 기억이 난다.

당시 아사히 (朝日) 신문 도쿄 본사에 근무했던 그는 나와의 단독 인터뷰를 위해 스마타쿄 (寸又峽) 까지 날아온 것이었다.

구마모토 (熊本) 의 '도노사마 (殿樣.나으리.봉건영주를 일컬음)' 후예인 그가 찾아왔다길래 호기심이 생겨 불러들였다.

그는 사실 그대로 보도할 테니 자세히 사건배경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고 나는 장시간에 걸쳐 그에게 특종거리를 안겨줬다.

2월 22일, 아니면 23일 밤의 일이다.

매우 진솔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도내용이 사실과 다르게 실린 것을 알고 매우 실망했다.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을 믿는다.

기사는 정확하게 써보냈지만 본사 데스크가 마음대로 고쳐 썼을 게 분명하다.

호소카와씨가 총리대신이 된 직후 내가 있는 구마모토 형무소 복도에 그의 부인 이름으로 된 화환이 여러개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사건 당시 잘못된 기사가 실린 것을 사과하는 의미로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의 가석방 소식을 듣고 호소카와 전 총리가 도쿄의 후원회 사무실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나 역시 호소카와와 일본에서 만든 영화 '김의 전쟁' 의 주연배우 비트 다케시는 꼭 한번 만나고 싶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 을 맞으며 나는 TV 속보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내게 민족차별의 울분을 안겨준 비열한 시미즈 (淸水) 경찰서의 고이즈미 (小泉) 형사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본경찰에 전한 유일한 요구사항은 "고이즈미 형사의 입을 통해 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민족차별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깊이 사죄할 것" 이었다.

방 안에서는 '인질' 로 불리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둘러앉아 고이즈미의 입을 통해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나보다 더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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