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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문학상 수상 시인 황인숙.소설가 정영문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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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상을 받게 되니 기쁘다! 이 한 마디면 족할 것을 왜 길게 수상소감을 쓰라고 할까?…생각, 기쁘다는 생각, 왜 상을 줄까 궁금하다는 생각, 그리고 생각아, 조금만 더 굴러가려므나!" 최근 제12회 동서문학상 시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황인숙 (41) 씨의 수상소감이다.

시인의 통통 튀는 개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소감이 말하듯, 대개의 문학상이란 어쩌면 한차례 기쁘고 말면 그뿐일 통과의례. 하지만 그동안 중진이상급들을 겨냥해온 동서문학상이 올해에는 시.소설 모두 '수상소감이라고는 처음 써보는' 시인 황인숙씨와 소설가 정영문 (34) 씨를 선정, 화제가 되고 있다.

네번째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로 상을 받은 황시인이 등단 15년 동안 별 상복 (賞福) 이 없었다는 점은 그가 구사해온 시어들에서 세월에 녹슬지 않는 상큼하고 경쾌한 맛을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뜻밖의 사실.

심사위원 오규원교수 (서울예대 문창과) 는 언어를 용수철처럼 튕겨오르게 하는 시인의 면모를 '고양이' 에 비기면서 "이번 시집은 현실을 말하지 않고 그의 욕망을 말하던 '고양이' 가 숨고, 그의 현실을 말하는 '아씨' 가 전면에 부상해 있는 모습" 이라고 무게중심이 단단해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말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고 평했다.

한편 소설부문 수상자 정영문씨는 96년 장편 '겨우 존재하는 인간' 으로 등단, 이번 수상작 '검은 이야기 사슬' 이 두번째 작품이란 점에서 '새로운' 작가이지만, 제목처럼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으로 짧은 이야기들을 연쇄적으로 풀어낸 작품세계 역시 낯설고 새롭다.

심사위원 김윤식교수 (서울대 국문과) 는 "매력적" 이라고 단언하면서도 "45편의 조각으로 된 이 소설을 한편의 작품으로 보아야할 지, 일종의 창작집으로 취급해야 할 지 난감하다" 고 덧붙였고, 서정인교수 (전북대 영문과) 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무 것인 것이 되고, 아무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 산문시들" 이라고 평했다.

경쾌한 시인과 어두운 소설가.

일견 대조적인 두 사람이지만, 수상소감을 묻기 위해 기자가 마련한 자리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레 서로의 경계를 넘어서는 문학대담이 돼버렸다.

선배격인 황인숙씨가 먼저 소설심사평의 '산문시' 란 비유에 대해 묻자 정영문씨는 "시를 써본 적은 없지만, 소설로 시 (詩) 적인 것의 경계에 다가가려고 한다" 고 답했다.

시인이면서 여러 해째 소설을 쓰겠다고 별러온 황인숙씨와는 반대방향에서 달려와 마주치는 셈. 이 마주침은 소설의 운명, 나아가 문학의 운명에 대한 낙관.비관이 대립하면서 한층 진지해졌다.

"소설장르를 무화 (無化) 시키려는, 일종의 종말 게임같은 것" 이라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한 정씨. "소설이란 장르를 해체할 수 있을 때까지 해체한" 베케트 이후 "과연 소설을 통해 새롭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라며 회의를 드러내자 황인숙씨는 "랭보는 세상의 모든 시를 다 썼다고 생각하면서 시를 때려치웠지만, 그 후에도 새로 써야할 시 (詩) 는 무궁무진했다" 고 격려섞인 반론을 내놨다.

이어 "어떤 욕망이 글을 쓰게 하느냐" 고 질문을 던진 것은 정영문씨. 황씨가 "내 경우 욕망보다는 쾌감이 원동력" 이라면서도 "여태까지 쓴 시도 형편없는데, 앞으로는 요 정도도 못쓰리라는 기분이 들 때" 의 괴로움을 상기시키자 정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기울였다.

수상소감 속에 채 담아내지 못한 글쓰기의 긴 고독은 개성이 대비되는 두 전업 (專業) 작가의 또다른 접점이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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