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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2세는 고종을 ‘왕’ 아닌 ‘황제’로 칭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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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국권 침탈의 위기 속에서 비밀스런 외교전을 펼쳤던 고종 황제(사진 왼쪽). 특히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던 독일과의 외교에 공을 들였다. 지속적인 외교전의 결과,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고종황제에게 밀서를 보내 “황제 폐하의 좋은 친구”임을 분명히 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했다. [중앙포토]

정상수(45) 명지대 연구교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으로 지난 8월 독일 베를린에 있는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에서 107년 간 잠들어 있던 황제의 밀서를 처음으로 찾아냈다. 독일 측에서조차 밀랍으로 봉인된 문서를 개봉하지 않은 채 소장했다고 한다. 그간 밀서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다. 정 교수는 독일 정치문서보관소의 동의를 받아 100여 년 간 봉인된 황제의 편지를 뜯었다. 잊혀진 대한제국 독립외교의 단면이 역사의 먼지를 벗고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대한제국 독립외교의 재평가=빌헬름 2세 밀서는 잃어버린 역사의 실마리를 풀어낼 중요한 단서다. 1906년 고종황제는 을사늑약(1905)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며 독일 빌헬름 2세에게 극비리에 친서를 전하려 했다. 2008년 2월 20일 본지 단독보도를 통해 알려진 이 고종 황제 밀서는 을사늑약의 국제법 상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한 중요한 자료다. 그런데 고종 황제가 왜 굳이 독일 황제에게 밀서를 보냈는지는 의문으로 남았다. 하지만 1902년 ‘빌헬름 2세 밀서’의 존재를 생각하면 그 의문이 풀린다. 고종 황제는 빌헬름 2세로부터 이 밀서를 통해 대한제국 독립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독일에게 대한제국 독립의 수호자이길 기대했던 건 결과적으로 ‘외교적 패착’일 수 있다. 독일은 당시 한반도에 절대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고, 결국 1차 대전의 패전국이 됐기 때문이다. 독일은 1902년 초 ‘영·일 동맹’이 체결되자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맞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후원하는 나름의 외교적 계산을 한 셈이다.

역사적 결과론과 별개로 대한제국의 독립외교 노력은 나름의 평가를 해 줘야 한다는 게 정 교수의 주장이다. 정 교수는 “1900년대 초 독일 공사로 파견된 민철훈(1856~?)은 독일어에 능통했던 반면, 같은 시기 독일 주재 일본 공사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며 “대(對) 독일 외교전에서 대한제국이 일본보다 앞섰기 때문에 고종황제와 빌헬름 2세 사이에 밀서가 오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광무개혁을 추진한 고종황제는 ‘어학이 국력’이란 생각으로 관립 덕어(德語·독일어)학교 등 일종의 ‘외교 아카데미’를 키우는데 노력했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자립 외교가 좀 더 지속될 수 있었다면 이후 역사의 향방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해석이다.

◆고종 비자금의 행방은?=1902년 빌헬름 2세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이듬해 동일한 내용으로 고종황제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1903년 4월 부임하는 대한제국 주재 독일 변리공사 콘라트 폰 잘데른을 통해 밀서를 전달한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밀서 전달이 한 해 늦어진 것은 1902년에 계획된 고종 즉위 40년 기념식이 조선의 콜레라 창궐 등 여러 이유로 연기, 축소됐기 때문이다.

밀서를 전달한 인물이 잘데른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의문도 풀린다. 잘데른은 1903년 말 고종이 독일 베를린에 있는 디스콘토 게젤샤프트 은행(훗날 도이체방크에 병합)에 거액의 내탕금(內帑金·임금의 개인 재산)을 예치하도록 도왔다. 독일 황제의 밀서를 가져온 사신을 고종 황제가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고종의 비자금은 당시 돈으로 100만 마르크(현재 추정 가치 500억 원). 1908년 일제가 고종의 비자금을 압수할 때 잘데른은 “훗날 고종황제의 사절에게 넘기라”며 비자금의 액수를 절반으로 줄여 보고한다. 그러면 고종의 나머지 비자금은 어디로 갔을까? 빌헬름 2세의 밀서를 통해 궁금증이 커져가는 역사 미스터리의 또 한 장면이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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