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3.15 부정선거
우리 국군이 헌법수호기관에서 자유당의 당군 (黨軍) 비슷한 모습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라고 생각한다.
55년 9월 김용우 (金用雨) 씨가 국방차관으로 기용됐다.
그는 자유당 조직국장 출신이었다.
국방장관은 해군제독 출신인 손원일 (孫元一) 씨였는데 선거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하급자인 金차관의 눈치를 보는 형편이었다.
金차관은 예하부대를 돌아다니며 노골적으로 자유당 선거운동을 했다.
결국 이승만박사는 56년 5월 실시된 3대 대통령선거에서 5백4만표를 얻어 당선됐다.
당선에 공이 컸던 金차관은 이듬해 국방장관으로 영전했다.
당시 나는 중장으로 국방부 동원차관보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일선부대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바람을 직접 타지는 않았지만 선거기간중 장.차관을 대신해서 국무회의에 참석해야 할 경우가 더러 생기곤 했다.
그때마다 자유당 정부가 점차 군을 정치도구화려하는 의도를 드러내보여 나는 내심 크게 걱정이 됐다.
자유당은 60년 3.15선거 때도 군을 동원했다.
이때 나는 6군단장으로 재직중이었는데 하루는 육본에서 군단장들에게 춘천 1군단 비행장으로 집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가 보니 송요찬 (宋堯讚) 참모총장이 와 있었다.
宋총장은 우리들을 모아놓고는 "모든 군단장들은 이번 선거에 李박사가 당선되도록 책임을 지시오. " 이런 요지의 얘기를 했다.
宋총장의 발언은 육군이 자유당의 당군으로 전락한 처지가 아니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군단장들은 묵묵부답 듣기만 하고 있었다.
'타이거 송' 이라는 별명을 지닌 총장의 불같은 기질도 그렇지만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반론을 제시한다는 게 당시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선임 군단장인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어나 "책임을 지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거요. 최선을 다하라면 모르겠지만 책임을 지라니, 그건 군단장들이 부정선거를 직접 지휘하라는 얘깁니까?" 라고 항의성 발언을 했다.
그러자 宋총장은 "책임을 지라는 말이 바로 최선을 다하라는 말" 이라며 서둘러 서울로 돌아가버렸다.
당시 정치상황을 감안할 때 李박사의 당선은 떼논 당상이었다.
국민들은 李박사를 국부 (國父) 로 받들고 있었고 그 외에는 달리 대안이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다만 부통령이 문제였다.
자유당은 이기붕국회의장을, 야당인 민주당은 장면 (張勉) 박사를 각각 부통령후보로 내세우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두분 모두와 인연이 깊었다.
李의장은 내가 국방부 3국장 시절 모시던 상관이었으며 장면박사는 그분이 주미대사를 지낼 때 내가 무관으로 근무하며 존경하던 분이었다.
그러니 나는 누구에게도 두분 중 어느 한분을 지지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6군단으로 돌아온 나는 8사단 (김종순) , 20사단 (문형태) , 25사단 (서종철) , 28사단 (이세호) 등의 예하 사단장을 모아 宋총장의 말을 전달만 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거를 지휘하던 하갑청 (河甲淸) 특무대장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다른 군단장들은 열심히 뛰고 있는데 6군단은 선거활동이 미약하다' 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알았다" 고만 대답해주었다.
자유당은 선거 승리를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심지어는 임화수 (林和秀) 같은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장충단에서 열린 조병옥 (趙炳玉) 씨의 집회에 난입, 행패를 부리게 하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장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와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장충단사건은 여당을 위해서도 하나도 이로울 게 없다" 는 말을 했더니 李의장은 정색을 하고 "강군이 몰라서 그래. 장충단 사건은 야당의 자작극이야" 라고 입막음을 하려 드는 것이었다.
나는 잠자코 물러 나오면서 새삼 '인 (人) 의 장막이 이 지경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결국 3.15선거에서 李박사와 이기붕씨가 정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자 민주당은 즉각 선거무효를 선언했다.
국민들은 "내 표를 내놓으라" 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4.19의 시작이었다.
글= 강영훈 전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