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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외규장각 도서반환 한국대표 한상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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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만난 사람 =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한국과 프랑스간의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상은 한마디로 '뜨거운 감자' 다. 노력은 노력대로 하고도 이렇다할 결실 없이 명분이나 지키는 데 그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그동안 한국측 협상대표로 여럿 물망에 올랐으나 대부분이 고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까다로운 자리에 최근 한상진 (韓相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하 정문연) 원장이 선임됐다.

지난 98년 4월 3일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 회담에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양국에서 한 명씩 권위있는 문화전문가로 협상대표를 내세워 허심탄회한 대화로 풀어가자" 는 제안을 했었다.

이에 따라 지난 1월 프랑스에선 자크 살루와 감사원 최고위원이 대표로 선정됐으나 우리측 대표는 수개월이 지나서야 어렵게 선정됐다. 예상되는 결과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 민감한 사안에 대한 '해결사' 역할을 맡은 소감이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 관심이 늘어나는 것이 협상에 유리한 점도 있지만 부담스러운 면도 있어요. "

이렇게 말문을 여는 韓원장은 인터뷰 내내 이 민감한 사안을 어떻게 진행하고 매듭지을지 고민하는 흔적을 내비쳤다.

- 협상대표를 맡게 된 특별한 배경이 있나요.

"정부가 이 문제로 장고를 하면서 배제해야 할 두 가지 원칙과 갖춰야 할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들었어요. 우선 운신의 폭이 제한적이고 자유로운 상상력 갖기가 어려운 관료는 협상대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직접 관계되는 서지학자.국제법학자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지만 협상대표로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동안의 과정을 보면 학자적 원칙만을 고수하니 보니 정면충돌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기 때문이죠. 아울러 갖춰야 할 두 가지 조건으로는 우선 유연하고 포괄적인 접근이 가능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도서문제 하나가 아닌 한.프랑스 간의 문화협력이라는 큰 눈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당연히 국제화 마인드가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

협상엔 국제 마인드 필요

- 그런 점에서 외부에서는 韓원장의 위상, 즉 한국학의 중심인 정문연 원장에다 국제적으로 통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점이 고려됐다고들 하는데요.

"내가 그런 식견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안을 당장 풀기 위해 정면대결하는 것을 지양하고 다소는 우회적이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협력을 쌓는 방식으로 접근하겠다는 다짐을 표명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

- 사실 93년 9월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하면서 '휘경원의궤' 한 권을 돌려줬는데 국립도서관에서는 관장 이하 전원이 사표를 던져 우리와 감정적 대립까지 있었지 않습니까.

"어렵지만 두 가지 점에 주목합니다. 하나는 어차피 한국.프랑스 정부 모두 좀더 생산적인 협력관계를 만드는데 외규장각 문제가 심각한 걸림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둘째, 정부간 대화나 전문가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국민간의 대화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봐요. 강화도 외규장각 약탈은 기본적으로 수긍할 수 없지만 큰 틀로 보면 양 국민간의 상호이해와 협력의 새로운 기틀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열려 있다고 봅니다. "

특유의 논리적.분석적 설명방식으로 '첫째…, 둘째…' 를 반복했지만 韓원장이 스스로 인정하듯 다소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한.불 문화교류라는 장기적 큰 틀을 생각지 않고 도서반환에만 협상논의를 국한할 경우 결렬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 따라서 그는 '포괄적이고도 근본적인 새로운 접근' 을 계속 강조했다.

- 살루와 대표와의 1차협상 일정과 장소 등은 정해졌나요.

"아직 일정이 잡히지 않았지만 서울의 호텔보다 정문연의 장서각 (藏書閣)에서 개최할 것을 검토 중입니다. 정문연 근처에 있는 순교한 프랑스 신부 무덤도 들러보고요. " 장서각은 우리나라 왕실의 귀중한 문헌인 의궤 4백21종. 5백73 책을 포함해 고서 8만3천여책과 고문서 5천1백여점을 소장하고 있어 서울대 규장각 (奎章閣) 과 함께 우리 정신문화의 보고로 꼽힌다.

- 협상장소가 분위기를 잡는데 그럴 듯합니다. 결국 정문연이 협상의 국민적 대표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한국학을 대표하는 곳은 정문연이고 우리 한국학을 세계화하는 일을 정문연이 해야죠. 협상을 이곳에서 함으로써 정문연의 역할을 세계에 알릴 수 있습니다. 이번 협상 자체는 단일 사안이지만 한국학을 세계화하는 과업이나 국내 한국학을 전체적으로 조정관리해 품질을 향상시키는 작업에서 정문연이 중추적 역할을 맡아달라는 의미부여가 혹시 저를 협상대표로 선임한 배경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상당히 조심스런 해석' 이라는 토를 달았지만 이 기회에 정문연이 한국학 연구중심 기관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내비친 말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협상의 방향이 다소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 것 같은데 구체적 협상전략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외규장각 도서가 우리 것이라는데 하등의 의문이 없습니다. 그러나 협상전략과 관련해 가장 핵심은 문화주권 개념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국민과 지식인 사회에 영토에 근거한 문화주권 개념이 상대적으로 강한 것이 사실이죠. 그렇지만 규범적으로 옳은 것이 현실적으로 항상 실현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당위.실정법 조화가 관건

- 새로운 의미의 '문화주권' , 특히 21세기를 향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상당한 의미부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백제에서 넘어간 문화가 일본에서 보존.발전된다고 해서 우리 문화가 아닌 것은 아니죠. 한민족도 현재 약 5백만명이 해외에 나가 있어요. 이젠 문화주권도 꼭 영토에 구속받을 필요가 없어요. 원래의 소유권에 관한 주권개념을 놓쳐서는 안되지만 국제화 사회에서 문화의 다양성.개방성을 통해 상호이해를 높여가는 유연한 전략도 필요하리라 봐요. "

- 혹시 돌려받는 문화재와 같은 가치를 지닌 우리 문화재를 주는 '등가 (等價) 교환' 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등가를 검증하는 것 자체가 까다로워요. 프랑스가 이런 방법을 제안할 때 까다로운 조건을 달기 위한 것으로 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양국간 협정에 의해 피식민국가로부터 약탈한 문화재를 반환한 사례가 있어요. 또 규모가 작아 상대적으로 협상하기 쉬운 경우 교환이나 대여방식으로 이뤄진 사례들도 있어요. 나아가 유엔과 유네스코, 최근에는 유럽의회에서도 약탈문화재를 돌려줘야 한다는 결의는 있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압력이지 실정법적 구속력은 없는 것이죠. "

- 그 당위와 실정법 상의 갈등을 푸는 방법이 문제의 핵심 아닙니까.

"당위와 실정법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입니다. 우리가 소유권을 당위적으로 강조하면 프랑스는 당연히 실정법을 들고 나올 것이고 그 결과는 교착이거든요. 그래서 '포괄적이고도 근본적인 새로운 접근' 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지금까지의 경험을 찬찬히 검토하고 있습니다. "

해외유출 문화재 65만점

- 이번 협상이 중국.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반환의 전범 (典範) 이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96년 9월 기준으로 약 65만점이 일본.프랑스 등 17개국에 걸쳐 유출됐습니다. 이들 가운데 외규장각 도서처럼 상대적으로 유출 경로가 분명한 경우에 대해선 좋은 전례가 될 수 있다고 봐요. 넓게 보면 제국주의가 전쟁을 통해 제3세계 문화재를 일방적으로 가져간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앞으로 21세기를 향해 인류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발전할 것인지 함께 지혜를 짜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서지학자.국제법학자.문화전문가의 도움을 결집해 협상을 진행하겠다는 그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안동방문이 우리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중요한 이벤트임을 설명하며 양 국민의 문화적 이해와 교류를 증진시키는 '문화외교' 방향으로 협상을 전개하겠다고 강조했다.

고속철도 TGV 한국 판매와 한.일 어업협정을 들어 문화교류 속에 감춰진 이익의 충돌 가능성을 지적하자 "발전적으로 생각하자" 며 인터뷰를 마쳤다.

[협상일지]

▶93년 9월 14일 : 미테랑 프랑스대통령 방한시 '교류방식에 의한 무기한 대여' 원칙합의

▶11월 15일 : 우리측,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에 '영구대여' 하고 한국이 프랑스에 다른 고서적 '시한부 교체대여' 방안 제시

▶94년 10월 21일 : 한국측, 1차 도서목록 제시

▶11월 25일 : 프랑스측, 10년 기탁후 5년단위 자동연장 수용

▶12월 12~15일 : 프랑스 도서전문가단 방한, 우리측 목록에 불만 외규장각도서와 '등가등량 (等價等量)' 도서 요구

▶95년 1월 5일 : 한국측, 2차 도서목록 제시

▶1월 20일 : 프랑스측, 2차 목록에 부정적 반응

▶97년 3월 6~7일 : 파리 실무협의. '교류형식' 과 '대여방식' 의 기본입장 확인

▶97년 5월 26일 : 한국측, 3차 도서목록 제시

▶98년 1월 20일 : 한국측, 3차 목록 질의서에 대한 답변서 송부

▶4월 3일 : 제2차 ASEM회의 (런던) 서 한.불정상회담 시라크 대통령, 양국 1명씩 권위적 전문가 선임 제의

▶99년 1월 19일 : 자크 살루와 프랑스 감사원 최고위원이 프랑스측 협상대표로 선임

▶3월 22일 : 한상진 원장이 한국측 협상대표로 선임

<약력>

▶45년 전북 임실 출생 ▶70년 서울대 졸업 (사회학) ▶79년 미 서던일리노이대 박사 (사회학) ▶81~98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서독 빌레펠트대 연구교수 (79~81년) , 뉴욕 컬럼비아대 교환교수 (91년) , 독일사회과학원 초빙교수 (93년) ,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96년) 등 거침 ▶98년 12월 제 10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 ▶현 제2건국위 위원 ▶99년 3월 외규장각 고문서 협상대표

정리 = 김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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