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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위기의식 있어야 경제 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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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요사이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보다 더 나쁘다고 한다. 최근 한 여론 조사를 보면 국민의 70%가 희망을 갖고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전문가들도 경제가 '일본형 장기불황'에 빠진 것이 아니냐고 걱정한다. 과거에는 수출이 증가하고 공장 가동률이 높아지면 반드시 투자가 증가하고 일자리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요즈음 아무리 돈을 풀어도 소비와 투자가 증가하기는커녕 감소추세로 나가는 것을 보면, 한국 경제는 이제 약없는 고질병에 걸린 것이 아닌지 두렵기조차 하다.

*** 샴페인 너무 일찍 터뜨려

선진국들도 간혹 경제의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었다.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일본과, 25년 전 '병든 유럽 국가'로 낙인 찍혔던 영국, 최근 저성장.고실업률로 고전하는 독일은 모두 선진국에 진입하고 나서 잠시 경제성장의 피로를 푸는 호흡조정 기간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구조적으로 경제체력은 상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진국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는다.

세계 60억 인구 중에서 국민소득 2만5000달러 이상을 유지한 18개국의 8억 인구는 선진국 대열에 계속 서있지만 1만달러 안팎에 있는 3억4000만 중진국 국민은 경제의 기복이 심해 50억 후진국 대열로 언제 다시 추락할지 위태로운 상황이다. 2000년까지 9000달러의 국민소득으로 중진국 대열에 속했던 아르헨티나는 계속된 정책 실패로 페소화의 폭락과 금융위기를 당해 다시 후진국 대열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한국 경제의 어려움은 일본.영국.독일 등 선진국들이 겪은 과도기성 불황증세가 아니다. 아르헨티나 같은 중진국이 겪는 보다 본질적이고 체제적인 경제 몰락의 초기 증세라고 진단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정부와 여당 사이에 논의되고 있는 추가예산 편성이나 금리인하, 규제완화, 노사관계 개선정책 등은 일시적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근원적 치유책은 될 수 없다.

한국 경제병을 정확히 진단하려면 어떻게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느냐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64년 100달러였던 국민소득을 95년 1만달러 이상으로 성장시켰던 배경은 한국전쟁과 냉전체제를 겪으면서 국민이 처절하게 느꼈던 심각한 안보위기였다.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 경제부흥을 통한 국력 양성만이 살 길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여러 가지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냈다.

일본 경제의 현대화는 유럽.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상징하는 '흑선(黑線)'의 위협에서 국가를 지키고자 감행했던 메이지(明治)유신의 위기의식이 배후에 있었다. 대만과 홍콩 경제의 도약은 중국 공산당과 인민군의 진격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맨몸으로 도망친 중국 피란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경제 기적도 50배 이상의 무슬림 원주민 인구를 가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의 안보 위협 탓에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 조국을 떠났던 중국과 인도의 이민들로 구성된 작은 신생국이 선진국 건설을 위해 죽을 각오로 일한 결과다.

*** 국민적 역량 다시 모을 때

그러나 일본.싱가포르.홍콩.대만 등은 국민소득 2만달러를 넘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으나 한국은 1만달러 선에서 긴장을 풀어버리고 선진국이 돼버린 양 미리 샴페인을 터뜨려 버렸다. DJ정부의 햇볕정책이 범한 역사적 오류는 '대북 퍼주기'가 아니라 너무 서둘러 남북통일의 장밋빛 꿈으로 남한 국민, 특히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를 세뇌시킨 데 있다. 한국의 강성 노조, 공격적 시민단체, 반기업 정서 등 경제를 멍들게 한 모든 여건의 저변에는 국민의 '위기의식' 상실이 있다. 잃어버린 위기의식을 거국적으로 되찾기 전에는 한국 경제의 앞날엔 희망이 없다.

경제부처 장관들이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치유하는 책임을 지기에는 이미 문제가 훨씬 더 커져버렸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국민적 역량을 다시 경제발전에 집중토록 해야 한다. 이는 단지 돈을 더 벌어 부자가 되자는 속된 목적이 아니라 유흥업소와 노래방 도우미들의 3분의 1이 가정주부라는 기막힌 현실을 돌파하고 우리도 선진국 국민답게 의연하게 살아보자는 뜻에서다.

박윤식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금융

*** 바로잡습니다

8월 14일자 23면 박윤식 교수의 '위기의식 있어야 경제 살린다' 제하의 칼럼 중 '흑선(黑線)'은 '흑선(黑船)'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