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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환갑 맞은 하루키, 총천연색 이야기 종합세트 내놓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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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조지 오웰의 미래소설 『1984』와 옴 진리교 사건 등을 토대로, 가까운 과거를 소설로 다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물이 장편소설 『1Q84』다. 하루키는 근작들을 통해 역사·사회적인 문제들에 부쩍 관심을 보이고 있다. ⓒ elena seibert

1990년대 초반, 하루키라는 이름 석자는 한 사람의 문화 취향을 드러내는 지표였습니다. 60년대 말 격렬했던 학생운동 이후 무기력해진 70∼80년대 일본 사회를 그린 그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를, 한국의 ‘386’들은 뜨거웠던 80년대 이후 전망 없어진 90년대라는 한국의 현실에 겹쳐 읽었습니다. 하루키가 방대한 새 장편소설 『1Q84』로 돌아왔습니다. 읽을 만한 그의 다른 작품들도 살펴봤습니다.

1Q84 BOOK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656쪽, 1만4800원

문학평론가 남진우는 무라카미 하루키(60)에 대해 “작품이 하나의 패셔너블한 상품으로 팔리는 시대의 도래를 알린 작가”라고 평한 바 있다. 상품으로 접근할 때 이번 장편소설은 정점에 도달한 듯한 작품이다.

일본에서의 반응은 유난하다. 발매 10일 만에 100만부나 팔렸다. 체코 작곡가 야나체크의 교향곡 ‘신포니에타’, 체호프의 여행기 『사할린 섬』 등 소설에서 언급된 음악·책 등은 그야말로 관뚜껑 열고 걸어나와 맹렬히 팔리는 중이다. 한국에서는 어떤가. 선인세 금액이 얼마냐가 화제가 됐었다.

그렇더라도 지나치게 흥분하지 말 일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자의 반응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수수께끼같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속설처럼, 소문 난 영화가 실망스러운 경우가 잦다. 무심코 봐야 ‘월척’을 건진다.

소설은, 학생 운동의 열기가 사그라든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일본 젊은이들의 성과 죽음을 감성적으로 다룬 『상실의 시대』와는 향취가 사뭇 다르다. 훨씬 두껍고(다음달 8일 출간되는 2권까지 합치면 1200쪽이 넘는다) 다채롭고 다이나믹하다. 표정관리라도 하는 걸까. 책에 대한 열띤 반응과는 대조적으로 하루키는 은둔을 선택한 듯 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지난 6월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 말고는 일체 취재 사절이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한 시대의 세상 전체가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종합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이를 위해 “순문학이라는 장르를 넘어 다양한 접근방식을 취했다”고 했다.

과연 소설은, 미국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인 듯한 탐정소설 코드,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와 똑같은 우주가 어딘가에 존재한다(평행우주론)는 SF적 요소, 남진우가 ‘댄디즘’이라고 표현한 문화 교양주의 등 다양한 맥락들을 아우른다. 전작들에서처럼 성애 묘사도 노골적이다. ‘하루키 종합선물세트’ 같다. 이런 ‘다양한 접근’을 통해 하루키는 사이비 광신도 집단, 가정 폭력, 비교육적인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의 스트레스 등 일본 사회의 병리현상들을 건드린다. 종합소설다운 면모다.

소설의 두 주인공은 초등학교 3·4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만 29살의 남녀 덴고와 아오마메다. 시간 배경은 1984년. NHK 수금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 일요일 수금에 나서야 했던 게 상처가 된 덴고는 학원 수학 강사를 하며 소설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다.

일주일에 한 번 열 살 연상의 유부녀 애인을 만나 성욕을 해결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소설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수영을 한다. 완벽하게 자기충족적인 삶의 사이클, 하루키 소설의 어쩔 수 없는 트렌디함이다. 덴고는 난독증 증상의 열일곱 살 미소녀 후카에리의 불가사의한 소설 ‘공기 번데기’를 전면적으로 고쳐 신인상을 받게 하는 불법에 가담한다.

아오마메는 미녀 킬러다. 고환을 걷어차 비열한 남성을 제압하는 호신술을 가르치는 스포츠 강사지만 청부를 받아 구제불능 구타 남편들을 살해한다. “콘돔 없인 삽입 없다”는 지론의 여자 경찰 아유미와 함께 짝을 이뤄 혼음도 마다 않으며 살인의 스트레스를 푼다.

24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아오마메의 홀수 장, 덴고의 짝수 장이 교차하며 두 사람의 옛 인연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제목에서 암시된 또다른 세상, ‘1Q84’의 실체도 한꺼풀씩 베일을 벗는다. 어느날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떠있는 장면을 목격한 아오마메,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다른 세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옮겨왔다고 여기고 이를 ‘1Q84’로 이름 짓는다. Q는 ‘question mark’(물음표)의 Q다. 하루키가 일본어의 숫자 ‘9’ 발음과 알파벳 ‘Q’와 발음이 같은 점을 활용한 것이다. 결국 소설의 메시지는 독재자 ‘빅 브라더’가 등장하는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와 연관된다. 하루키는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난 빅 브라더가 힘을 잃은 상황에서 ‘리틀 피플’이 관여하는 소규모 광신도 집단이 판 친다는 점을 경고하려 한 듯하다. ‘리틀 피플’의 실체는 2권에서 드러날 것이다. 하루키 팬이라면 남은 한 권 때문에 목이 길어질 것 같다.

신준봉 기자

왜 하루키인가
나직이 전하는 울림 큰 목소리 “그래도 살아야 하잖아”

하루키는 아픈 역사적 기억과 반일교육으로 인한 반감 내지는 무시를 극복하고 오에 겐자부로, 나쓰메 소세키도 달성하지 못한 한반도 상륙을 처음으로 성공리에 마친 일본 작가이다. 하루키의 성공 요인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상실의 시대』(1987)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2002)를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바람…』은 20대의 마지막 해를 맞이한 ‘내’가 털어놓는, 1970년 8월 8일부터 8월 26일까지의 이야기이다. 40개의 짤막한 단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금욕적이면서 상냥한 ‘나’는 남의 개인적인 일에는 관여 안 한다. 질투, 경쟁심, 열등감, 집요함 같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인간적 속성이 전혀 안 보이는 인물들만이 생존권을 보장받고 있는 세계. 그것이 리드미컬하고 감각적이며 유머러스한 문장으로 그려진다.

1960년대의 일본학생운동의 좌절이 바탕에 깔려있지만 그 아픔은 당의에 싸여 청춘기에 겪는 아련한 상실감에 겹쳐진다. 데뷔작에는 작가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들 한다. 하루키 문학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실을 노래하면서도 부정을 거친 후의 삶의 긍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상실의 시대』에도 이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자살로 잃은 나에게 레이코는 “나오코의 죽음 때문에 아프다면 그 고통을 남은 인생동안 계속 간직해. 거기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도록 해. 힘들겠지만 강해져. 더 성장해서 어른이 돼”라고 한다. 이 작품 또한 상실과 아픔을 겪은 후의 회복과 긍정을 그려내 청춘기의 상실의 아픔과 아련한 그리움, 그리고 살 용기를 제시한다.

만 15세 소년이 주인공인 『해변의 카프카』 역시 세상에서 제일 터프한 소년이 되겠다는 주인공이 수많은 우여곡절과 신비한 체험을 겪고 재생을 위해 고독한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이다. 거기에 거대담론은 없다. 개인과 우리 삶에 무엇이 중요한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물음이 있고 일상의 발견이 있을 따름이다.

이 때문에 거대담론과 민주화운동에 몰입하던 이 땅의 386세대가 하루키를 접했을 때 충격이 컸을 것이다. 개인의 고유한 경험을 바탕으로 존재이유의 모색이 핵심이 되어 있는 하루키 작품은 그간 믿어온 문학의 당위성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루키는 역사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작가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1995년의 한신대지진과 도쿄지하철 사린사건을 계기로 디터치먼트(방관)에서 커미트먼트(참여)로 전환하여 『언더그라운드』를 펴낸 것은 그 하나의 발현이다.

김춘미 (고려대 명예교수·일본연구센터 번역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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