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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堯舜과 클린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대통령을 그만큼 잡아 흔들고도 미국이 큰 탈 없이 굴러가는 것은 신통하다.

대통령이 몸소 나서야만 일이 돼가는 우리와는 딴판이다.

야당인 공화당이 빌 클린턴에 대해 품고 있는 불신.증오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우리 이해와도 직결된 대북.통상정책에서 공화당이 사사건건 클린턴을 잡고 늘어지는 데에는 "이젠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못믿겠다" 는 짙은 앙금이 깔려 있다.

이런 정쟁 (政爭) 이 탄핵재판까지 갔지만 국정의 일대 혼란에 대한 걱정은 어디 한군데서도 나오지 않는다.

리더십 약화가 대외정책 등에 미칠 영향을 따져보는 논의 정도가 고작이다.

이처럼 마음 턱 놓고 (?) 정쟁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 미국인들은 "미국은 대통령 한 사람만 쳐다보고 가는 나라가 아니다" 고들 말한다.

권한이 잘 분산돼 사람보다 제도가 끌고 가는 나라니 정쟁에 넌덜머리를 낼지언정 불안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권력 주변이 잠잠할 수는 없다.

지금은 요순 (堯舜) 시대가 아니다.

정파 다툼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정치 현상이다.

클린턴 정권은 부동산.금융 사기사건인 화이트워터 스캔들로 시작해 파일게이트.지퍼게이트에 이르기까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야당 중진 등에 대한 연방수사국 (FBI) 의 자료를 백악관이 가져다 악용하려 했다는 의혹이 파일게이트였고, 지퍼게이트는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도 이른바 총풍.세풍.529호실 사건들로 정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퍼게이트보다는 훨씬 고상한 일을 놓고 싸움이 벌어져 다행이지만 싸움의 모양새를 보면 격과 질이 한참 떨어진다.

안보.세금.정치사찰 등 전혀 다른 분야에서 불거져 나온 총풍.세풍.529를 한데 꿸 수 있는 '질긴 실' 하나는 바로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이다.

총풍.세풍이 불 수 있는 토양에서의 일기예보는 언제나 같다.

"적 (敵) 과 내통을 하든, 기업을 후려쳐 돈을 긁든 대통령이 되면 모든 것은 덮어진다" 다.

그동안엔 맨날 맞던 일기예보가 이번엔 빗나갔을 뿐이다.

또 파일게이트나 529나 비슷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FBI도 정치인.공직자들에 대한 자료를 쌓아두고 있다.

그러나 백악관이 파일을 보려면 적절한 이유를 댄 문서로 사본을 요청하고 이를 기록에 남기며, 보고 나선 백악관 문서보관소에 죄 넘겨야 한다.

미 의회가 수상한 방의 문을 뜯지 않고도 파일게이트를 파헤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제도 때문이었다.

그래도 백악관이 불법으로 파일을 봤다는 의혹이 일자 FBI는 백악관에 사본을 주는 규정을 강화시켰다.

다행히 총풍.세풍.529같은 의혹 사건은 지금 정권에서는 다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지난 날의 피해자였던 데다 선 (善) 한 개혁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못 믿겠는 것은 다음 대통령이다.

다시 세풍을 일으키고 정치사찰에 열을 올리며, 심지어 전 정권의 작품인 '빅딜' 을 도로 뒤집어 엎을지 누가 알랴. 대통령제를 지키든, 내각제로 가든 걱정은 마찬가지다.

金대통령과 달리 모자라거나 나쁜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큰 일 아닌가.

이런 걱정을 덜고 현 정권의 선한 의지가 계속 이어지게 하려면 金대통령은 다음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여지를 줄여놓는 것이 상책이다.

예컨대 정보기관의 파일은 청와대든 어디든 반드시 정당한 이유를 대고 기록을 남겨야만 볼 수 있도록 법에 정하면 싸울 일이 크게 줄어든다.

또 국세청이 독립적 위원회의 감독을 받는다면 세풍은 불기 어렵다.

지난해 클린턴도 서명한 미 의회의 국세청 개혁법안은 9명의 감시위원회 (6명의 민간전문가, 재무장관.국세청장.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인준하는 3명의 위원)가 세무행정을 감독하도록 하고 있다.

검찰의 독립도 선언 아닌 제도로 이뤄야 한다.

또 대통령의 전횡이 싫다고 내각제라는 모험을 무릅쓰기보다 국회의원이 경선으로 뽑히도록 해 3권분립에 충실해지려는 노력부터 해봐야 한다.

모두 하루 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한국은행 독립처럼 운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도도 쓸모 없다.

그러나 방향은 제대로 잡아야 한다.

요컨대 언제 어느 대통령이 역사상 처음으로 기득권을 포기하느냐다.

현직 대통령들이 계속 안하면 언젠가 검찰권 독립을 공약으로 치고 나서는 후보가 등장하고 국민이 그를 지지할 수도 있다.

클린턴에게서 요.순 임금을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수길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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