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전에 바치는 한 송이는 ‘영원한 생명’얻으시라는 뜻

중앙선데이

입력 2009.08.23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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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 02면

穎雲 金容鎭, 국화도(菊花圖), 1942년, 지본담채, 108.5×34.5㎝. 학고재 제공.
인류의 조상으로 꼽는 네안데르탈인이 원숭이와 다른 점을 알려주는 증거가 있다.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동굴에서 장례 의례 때 꽃을 사용한 흔적이다. 꽃은 본디 인간의 생존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꽃이 아니라 배를 불릴 수 있는 열매다. 나비나 벌을 위한 것이 꽃이다. 생존과 관계없는 여분을 문화라 부른다. 먹지 않는, 즉 생존과 관계없는 꽃을 필요로 했다는 것,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꽃을 사용했다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문화’를 갖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다.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들려주는 국화 이야기

장례식에서 꽃을 사용하는 것은 서구에서는 오래된 전통이다. 세계 공통으로 상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삶은 색채, 죽음은 무채색으로 상징된다. 조화 역시 검은 꽃은 없으니 흰 꽃을 쓴다. 특히 프랑스·벨기에 등 라틴문화권에서 장례식 때 조화(弔花)로 사용하는 꽃이 국화(菊花)다. 그래서 라틴계 사람들에게 선물로 국화를 내미는 것은 결례가 된다.

그런가 하면 영국이나 미국·오스트레일리아 등 영미문화권에서는 장미나 백합 등을 사용한다. 이들 나라에서 국화는 어머니를 위한 꽃이다. 영어로 크리산트멈(chrysanthemum), 줄여서 멈(mum)이라고도 불리는 국화는 엄마를 뜻하는 멈(mum 또는 mom)과의 언어적 유사성 때문에 우리네 카네이션처럼 어머니날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반면 우리 조상들은 누가 세상을 떠났을 때 꽃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향을 피우고 술과 음식을 준비해 주위에 뿌렸다. 혼비백산(魂飛魄散)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 혼(魂)은 날아가고, 백(魄)은 흩어지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혼백이 육신을 떠난다는 뜻이다. 이때 날아가는 혼을 위한 것이 향이고, 흩어지는 백을 위한 것이 술이다.
우리가 상가(喪家)에서 국화를 사용하는 것은 근대 이후 일본과 서구 문화 등을 통해 들어온 습속이 아닌가 싶다. 일본에서는 장례식 때 국화로 시신의 옆을 빈틈없이 채울 정도다.

일본인들은 봄 벚꽃, 가을 국화라 부를 정도로 국화를 좋아한다. 일본의 화훼류 중 가장 많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꽃이 국화다. 품종 개량에도 적극적이어서 수많은 종류가 있다. 일본의 국화 산업은 세계 1위다. 일본 왕실의 문양도 국화다. 12세기 말 천왕이었던 고토바(後鳥羽) 천왕이 국화문을 즐겨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나오는 국화는 천왕의 위엄과 일본인의 미의식을 뜻한다. 일본 왕실이 문장(紋章) 도안에 벚꽃 대신 국화를 선택한 이유는 화사하지만 곧 스러지는 벚꽃보다 국화의 장수(長壽) 이미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사군자 중 하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국화는 수명장수, 부귀복락의 상징이다. 그래서 장례식에서의 국화는 역설적으로 죽음이 생명의 종결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또 다른 시작이라는 의미를 상징한다. 영생을 희구하는 신앙에 바탕한 것으로, 국화를 덮고 잠자다가 부활하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서울대 미대 김병종 교수)는 얘기다.

국화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다. 화려한 도화(桃花)나 모란이 봄을 뜻한다면, 가을에 피는 국화에는 서리와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꽃을 피우는 기상이 서려 있다. 오상고절(傲霜孤節)이다. 무서리 내리는 늦가을에도 단아한 자태와 기품을 잃지 않는 군자 혹은 선비다. 성숙한 노년의 완숙미, 인고의 아름다움이란 이미지가 물씬 풍겨 나온다.

여말선초의 사람인 이헌 성여완(1309~1397)은 ‘일찍 심어 늦게 피니 군자의 덕이로다/풍상에 아니 지니/열사의 節이로다/세상에/도연명 없으니 뉘라 너를 이르료?’라고 읊었다. 도연명을 언급한 이유는 그가 저 유명한 ‘귀거래사’에서 국화의 기상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세 갈래 길은 황량하게 되었지만/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히 남았도다’라며 국화를 한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짝짓기도 했다.

국화는 단순한 감상용 꽃을 넘어선다. 술도 담궈 먹고, 전도 부쳐 먹고, 차도 끓여 먹는다. 이는 한국과 중국·일본 세 나라의 공통된 풍속이다. 국화의 여린 싹은 나물로 무쳐 먹고, 입과 꽃은 술을 빚어 마신다. 뿌리나 씨앗은 약으로 활용한다. 중국에서는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온 가족이 모여 국화주를 마시는 풍속이 있었다. 국화주는 재액을 막아 준다는 속설 때문이다. 좋으면 미각(味覺)까지 충족시키려는 심리다. 바깥 것이 안으로 들어온다. 그럼으로써 물아일체(物我一體),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된다. 서구인의 눈으로 보면 깜짝 놀랄 일이다.

탐스러운 흰색의 국화에는 이처럼 세상의 각박함에 굴하지 않는 지조와 가을의 풍요로움과 노년의 완숙함과 액운을 물리치는 영험함의 이미지가 고루 담겨 있다. 장례식에서 국화를 쓰는 것이 우리 삶 속에 자리 잡은 이유는 가신 이를 기리고 아쉬워하는 남은 이들의 심정을 국화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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