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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보고 두번 보고 ‘각설이 대폭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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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국내에 록음악이 태동한 1960년대 초의 키워드는 4·19혁명, 5·16쿠데타, 경제개발이었다. 정치·사회적 변혁을 통해 마련되기 시작한 국가 재건이 최대 화두였던 당시 미군의 여흥을 위해 국내에 유입된 서구의 대중문화는 사회 각 분야에 일대 혁신을 몰고 왔다. 그때 이 땅에도 록 밴드가 탄생했다. 이후 한국 록 음악사를 수놓은 밴드들은 모래알처럼 무수하지만, 그 중 신중현의 ‘에드훠’와 ‘키보이스’는 한국 록의 뿌리로 평가받는 양대 산맥이다. 한국 록의 역사는 이들로부터 가지를 치며 개체를 늘려 현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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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은 미8군 무대에서 ‘히키 신’이라는 애칭으로 활동했다. 비틀스가 첫 싱글 음반을 낸 1962년 그는 테너색소폰 신지철, 드러머 김대환, 기록에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2명과 함께 미8군 4인조 패키지쇼 그룹 ‘클럽데이트’를 결성했다.

전화선으로 가야금 만들던 ‘꼬마’, 한국 록의 대부가 되다 #기획연재 | 한국이 낳은 불후의 대중가요 뮤지션 12인 - ⑧ 신중현

왜소한 체격의 신중현은 장대같이 키가 컸던 멤버 신지철의 가랑이 사이를 오가며 연주하는 기타 실력으로 기립박수를 받을 만큼 쇼맨십이 대단했다.

신중현의 음악역사는 곧 한국 록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결성했던 록 밴드들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음악적 시도는 한국 록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외국 곡 카피에 연연했던 동시대의 다른 록 뮤지션과 달리 자신의 음악을 창작하고 연주하고 노래했던 최초의 록 싱어송라이터라는 점에서 그는 확연히 차별적이다.

신중현은 호적이 복잡하다. 어린 시절의 가정사 때문이다. 호적상의 생일은 1943년 11월13일이지만 실제로는 1938년 1월4일이다. 그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형편이 어려워 군대에 가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나이를 줄여 호적신고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42년 부친을 따라 중국 만주에서 잠시 살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한국전쟁 때 충북 진천으로 피란을 떠났다.

독학으로 기타 익혀 쇼단에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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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신중현(가운데)과 ‘에드훠’ 멤버.
“진천에 살 때 미군이 버린 탄약 박스에서 떼어 낸 널빤지에 전화선을 엮어 가야금을 만들었다. 무늬만 가야금이었지만 그 가야금으로 어머니의 하모니카 소리에 맞춰 민요나 동요를 연주했다.”전쟁 중에 병으로 부모와 여동생을 잃고 소년가장이 된 그는 전쟁 후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의 한 제약공장에서 일했다.

심신이 고단하던 그 시절, 그는 미군 통신용 무전기로 AFKN 방송을 잡아 외국음악을 접하면서 독학으로 기타를 익혔다. 서라벌고 야간부에 입학한 후 막 생겨난 음악감상실에 드나들며 재즈음악에도 빠져들었다. 결국 종로에 있던 기타학원의 선생이 되었는데, 당시 제자였던 미8군 남자무용수의 주선으로 오디션을 통과해 쇼단 ‘스프링버라이어티’의 멤버가 됐다.

작은 체구 때문에 ‘스코시’(일본말도 꼬마라는 뜻)로 불렸던 그는 음반을 틀어놓고 잘 만큼 음악에만 전념했다. 오디션을 통해 음악 수준에 따라 등급을 매겨 개런티를 차등 지급했기에 혹독한 연습은 필수였다. 신중현의 회고다.“악기창고를 연습실로 사용하면서 무대연주시간 외에도 매일 8시간씩 손가락에 피가 맺힐 정도로 연습했다.”

‘기타의 신’이라고 극찬받는 그의 연주 실력은 타고난 기질과 피나는 연습이 빚어낸 인고의 합작품일 것이다. 데뷔 초기 미군들은 신들린 듯 연주하는 그를 ‘히키 신’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당시 미군들은 유럽에서 시작된 록보다 자국에서 각광받는 로큰롤에 더 열광했다.

신중현은 록 음악을 위해 미8군 무대를 떠나는 모험을 감행했다. 비틀스 음악에서 모티프를 얻어 한국적 록음악을 시도하려는 야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비틀스의 애칭인 ‘Fab4’와 비슷하게 그룹 이름을 ‘에드훠(Add4)’로 정하고 4인조 라인업과 의상까지 벤치마킹했다.

일반 무대에 도전장을 내기 위해 멤버들과 밤에는 동두천 미7사단 클럽에 출연해 생활비를 충당하고 낮에는 작곡과 연주 연습에 몰두하며 승천을 꿈꿨다. 그러나 수없이 교체된 멤버의 라인업 구성도 문제였지만 우선 취입할 곡이 부족했다. 당시는 싱글에 대한 개념이 없어 무조건 10곡이 넘는 앨범으로 음반을 제작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한국 최초의 창작 록 앨범에 수록할 곡 창작과 연습을 위해 2년여의 세월이 필요했다. 에드훠의 음반 녹음은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장충녹음실의 카펫이 깔린 응접실에서 단 하루 만에 끝났다. 멤버들은 정식 녹음장비가 아닌 휴대용 미군용 릴 테이프 녹음기에 길게 연결된 단 한 개의 마이크 주변에 모여 동시녹음을 시도했다.

연주나 노래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녹음하는 악조건이었다. 동두천에서 맹연습한 멤버들은 아침부터 시작된 14곡의 녹음작업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끝내는 초능력을 발휘했다. 한국 최초의 창작 록 앨범은 이런 척박한 토양에서 탄생했다. 1964년 12월. 오랜 산고 끝에 탄생한 에드훠의 첫 앨범의 화두는 한국 최초의 창작 록으로 공인된 <빗속의 여인>이다. 신중현의 증언이다.

“트로트가 대부분이던 시절이어서 <빗속의 여인>이 처음 나왔을 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삼천만의 주제가가 됐다. 길을 가다 옷가게에 들르면 여자 종업원까지 <빗속의 여인>이 좋다고 했을 정도로 이 노래는 여성들이 특히 좋아했다.”
신중현의 증언처럼 발표 당시 이 음반은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음악적 야망을 이루기에는 시기상조였다. 1966년 결국 밴드를 해산했다. 먹고 살기조차 힘들어진 신중현은 다시 동두천 미군클럽으로 돌아갔고, 이후 10년의 무명 시절을 감내했다. 당시 대중적 인기는 화려한 무대 매너와 외국 히트곡을 번안해 활동했던 라이벌 밴드 ‘키보이스’의 몫이었다.

한국적 사이키델릭 록 창시와 ‘신중현사단’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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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엽전들’ 시절 벙거지를 쓰고 있는 신중현.
키보이스 또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밴드다. 소위 ‘이미테이션(카피) 그룹’이었던 이들은 해변에 연관된 노래로 인기를 끌던 ‘비치보이스’와 ‘비틀스’의 노래를 주 레퍼토리로 활동했다.

때문에 이들의 음악은 ‘서핀 사운드(Surfin Sound)’다. 그 때문일까? 전기는 물론 후기 키보이스의 히트곡들은 <정든 배><해변으로 가요><바닷가의 추억> 등 바닷가를 소재로 한 노래가 많았다.

1960년대 말, 당시는 월남전으로 불거진 반전 움직임으로 자유와 평화를 부르짖는 히피문화가 전 세계를 뜨겁게 달궜다. LSD 음악으로 대변되는 ‘사이키델릭’에 감명받은 신중현은 자신의 음악 지향점을 한국적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고정시켰다. 그의 말이다.

“때마침 나를 찾아온 미국 히피들과 어울리며 마약과 사이키델릭에 심취했다. 당시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 둘째아들 윤철이가 가족여행 때 멀리 농가에서 들리는 돼지 우는 소리를 듣고 ‘지미 핸드릭스의 기타 연주 소리가 난다’고 말했을 정도다.”이후 신중현은 5인조 록그룹 ‘덩키스’로 재도전을 시도했지만 또 좌절하고 만다.

그런데 반전의 기회는 우연하게 왔다. 월남으로 공연을 떠나려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발표한 ‘펄시스터즈’의 음반이 대박을 터뜨렸던 것. 하지만 활동 1년 만에 가수왕에 등극한 펄 자매는 그를 떠났다. 이에 김상희를 영입했고 김추자를 발굴했다. 신중현은 이때부터 사이키델릭에 농악과 창을 함께 녹인 독특한 한국적 사이키델릭 록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신중현의 록 밴드 창단 이력은 덩키스 해산 이후 1970~1971년 2년 동안 황금기를 맞았다. <봄비>로 유명한 박인수의 공식 데뷔 음반인 ‘퀘션스’의 첫 앨범에는 당시 연세대 응원단장 출신으로 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임성훈도 있었다. 이때 신중현은 히트곡 제조기로 불리며 절정기를 맞았다.

기존 가수는 말할 것도 없고, 셀 수 없이 많은 가수 지망생이 그의 곡을 받기 위해 사무실 문 앞에서 문전성시를 이뤘다. 저음의 소울 창법이 독보적인 <미련>의 장현과 임아영, 자매 듀엣 ‘바니걸스’, 민아·주현·지연·차현아, 시각장애인 윤용균, 김명희·김정미·함중아 등이 이 시절 그의 문하에 들어왔던 가수다.

신중현은 가수 관리를 위해 20여 명이 넘는 직원으로 구성된 사무실을 운영했을 만큼 호황을 누렸다. 신중현 문하의 수많은 가수는 이때부터 ‘신중현사단’이라는 특별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각설이타령조의 <미인>으로 대중을 놀라게 하다

1971년 말 바쁜 와중에도 신중현은 6인조 록그룹 ‘더맨’을 결성해 음악적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정권을 출범시켰다. 전성기를 맞은 신중현에게 유신정권의 탄생은 좌절과 음악적 사망의 신호탄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의 노래를 만들라’는 청와대의 전화 청탁을 거절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신중현은 자신이 생각하는 애국가를 만들었다. 바로 <아름다운 강산>이다. 그러나 음반은 괘씸죄로 판금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더맨의 리드보컬 박광수는 삭발하고, 멤버들은 머리핀을 꽂아 귀만 내민 치렁치렁한 장발 모습으로 MBC TV의 토요일 쇼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장면을 현란한 사이키 조명으로 조롱하며 감행한 18분에 걸친 <아름다운 강산>의 연주는 일종의 음악시위였다. 요주의 대상으로 낙인 찍힌 멤버들의 음악활동에는 곧 통제가 뒤따랐다. 역설적이게도 신중현은 이 통제받던 시절 수많은 명곡을 창작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겠지만 더맨의 음악이 유신정권의 탄압 없이 자유롭게 펼쳐졌다면 우리 가요의 수준이 어떻게 발전했을까 궁금하다. 이후 ‘엽전들’을 결성한 신중현은 벙거지를 눌러쓰고 각설이타령처럼 부른 <미인>으로 충격파를 날렸다. 단순반복하는 노랫말과 경쾌하고 친근한 선율은 듣는 이의 혼을 빼앗았다.

“한국적 록 사운드를 창조했다”고 평가받는 엽전들의 1집 타이틀곡 <미인>은 계층을 초월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각설이타령조의 지독히 단순한 노랫말과 가락의 반복은 “우리 고유의 가락을 살린 독특한 스타일의 록”이라는 찬사와 “각설이타령을 흉내낸 퇴폐가요”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이미 괘씸죄에 걸려있던 신중현의 <미인>은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라고 개사돼 불린다는 퇴폐적 이유와, 대학가에서 정권 연장의 의미로 유행하면서 어김없이 금지의 족쇄가 채워졌다. 이 음반이 남긴 진귀한 기록은 <미인>을 포함해 10곡의 수록곡 중 7곡이 퇴폐·저속·방송부적합을 이유로 금지됐다는 사실이다.

이 음반에는 놀라운 트랙이 하나 있다. 구슬픈 상여가락에 <나는 너를 사랑해>를 거꾸로 해서 제목을 단 <해랑사를 너는 나>다. 숨막히는 사회적 현실을 조롱하기 위해 노래 가사를 거꾸로 부른, 당시로서는 용기백배한 노래였다.

신중현은 이후 1975년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활동이 전면 금지됐다. 비록 1980년 해금되면서 ‘뮤직파워’ ‘세 나그네’ 같은 록 밴드와 많은 가수의 음반 편곡으로 활동을 이었지만, 그의 창작력은 1975년 사실상 끝났다. 하지만 좌절의 세월 속에 침몰했던 그의 실험적 음악은 1990년대 들어 재평가 작업을 통해 ‘록의 대부’로 확실하게 자리매김됐다.

한국 최초의 록 밴드를 찾아라!

한국 최초의 록 음반은 무엇일까? 그동안 신중현의 ‘에드훠’가 1964년 발표한 첫 앨범에 줄곧 월계관이 씌워졌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발표된 ‘키보이스’의 데뷔 앨범이 최근 발견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사실 밴드 형식으로 결성된 최초의 록그룹은 키보이스나 에드훠도 아닌, ‘코끼리브라더스캄보밴드’다. 이름조차 생소한 이 밴드는 음반의 존재가 확인된 적이 없어 록 애호가 사이에 전설적으로만 회자하는 밴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결성된 록밴드 ‘김치스’와 ‘바보스’도 있었지만, 이들 또한 앨범 미발표로 논쟁에서 제외된다.

발매 시기로만 따지면 키보이스의 데뷔 앨범을 최초로 인증하는 것이 옳다. 이 음반이 발표된 것은 신중현의 에드훠가 발표된 1964년 12월보다 5개월 앞선 7월3일이다. 따라서 키보이스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 <그녀 입술은 달콤해>는 한국 록 밴드가 발표한 최초의 트랙이라는 결론이다.

다만 수록된 모든 노래가 밴드 멤버들의 창작곡이 아닌 트로트 전문 작곡가인 김영광의 곡과 번안곡으로 채워져 있음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 때문에 창작곡 부재로 공식 인증서 발급에 걸림돌로 작용되는 분위기다. 시기적으로 앞선 키보이스의 앨범이 발견된 후에도 에드훠의 첫 앨범을 여전히 최초의 록 앨범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는 이 앨범에 실린 모든 곡이 신중현의 창작곡이기 때문이다.

이는 포크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통기타 음반은 1964년 발표한 남성4인조 ‘아리랑브라더스’의 데뷔 앨범이다. 포크 대중화의 포문을 연 송창식·윤형주의 ‘트윈폴리오’의 1968년 음반도 있다. 하지만 두 앨범 역시 ‘창작곡이 없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사실 1970년 창작곡이 수록된 데뷔 음반을 발표한 혼성 듀엣 ‘뚜아에무아’의 앨범도 있고, 1971년 발표된 김민기의 창작 앨범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 모던포크의 창시자’ 타이틀은 1974년 첫 앨범을 발표한 한대수에게 발급돼 있다. 이는 1968년 그가 미국에서 건너왔을 때 이미 최초로 창작 포크송 <옥이의 슬픔>과 <행복의 나라로>를 발표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논쟁거리가 하나 더 있다. 누가 국내 최초의 여성 로커인가 하는 대목이다. 에드훠·키보이스의 앨범에는 공교롭게도 각각 한 명의 여성 보컬이 참여했다. 에드훠의, 1970년대를 풍미했던 인기가수 장미화가 신중현의 창작곡 2곡을 취입하며 정식 가수로 데뷔했다.

이는 1964년 KBS 아마추어 톱싱어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장미화가 ‘신중현사단 1호 여가수’라는 증명서다. 하지만 장미화는 정식 멤버가 아닌 객원으로 참여한 것이어서 공식적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다. 키보이스는 결성 당시 그룹 이름을 ‘열쇠들’이라는 뜻의 ‘더키즈(THE KEYS)’로 정했으나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름을 변경했다.

일반 무대에서는 키보이스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미8군 무대에서는 ‘록앤키(LOCK&KEY)’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여기서 ‘록(LOCK)’은 정규 멤버인 여성 보컬을 지칭한 이름인데, 주인공은 송영란이다. 그는 윤복희와 함께 여성 듀엣 ‘투 스쿼럴스’로 활동했던 미8군 출신 여가수다. 객원보컬 장미화와 송영란의 차별성은 정식 멤버인가 여부다.

키보이스의 데뷔 음반에는 송영란의 노래가 한 곡 실려 있다. 번안곡 <귀여운 내 사랑>이다. 이 노래는 비록 창작곡은 아니지만 한국 록 밴드 역사상 정식 여성 멤버가 발표한 최초의 곡으로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전 <한국일보> 기자이자 프로 사진가. 7080 음악열풍을 주도한 공연기획자. 희귀 음반을 비롯한 대중문화자료 수집가. KBS·SBS·CBS·교통방송 등에서 음악프로그램 진행. 현재 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각종 신문·잡지·사보에 대중문화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글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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