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26>이영도의 애틋한 삶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6호 10면

시조 시인 이영도.

1975년 초가을께 한국시인협회가 주최하는 ‘현대시 세미나’를 취재한 일이 있었다. 2박 3일의 일정으로 전주 가톨릭센터에서 열렸다. 세미나에 참여한 100명 가까운 시인 가운데서 유독 한 시인이 눈길을 끌었다.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였다. 60년대 후반, 20년간 유치환으로부터 받은 5000여 통의 연서 가운데 일부가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의 책으로 공개돼 화제의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밝은 한복 차림의 이영도는 환갑을 한 해 앞둔 여인답지 않게 곱고 해맑았다.

첫날 오후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또 다른 스케줄을 위해 참석자들은 1층 로비에 모였고, 뒤늦게 몇몇 시인이 2층 숙소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한복 차림의 한 여성이 계단 중간쯤에서 발을 헛디디며 ‘쿵’ 소리와 함께 1층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이영도였다. 로비에서 서성이던 몇몇 시인이 그 앞으로 달려갔다. 전주 토박이 시조시인 최승범이 부상이 심한 듯 괴로워하는 이영도를 들쳐 업고 근처 병원을 향해 내달렸다.

그 사고가 원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영도는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았다. 병원에 자주 드나든다는 소문이더니 사고 이후 꼭 6개월 만인 76년 3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아침나절 갑자기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저녁 무렵 숨을 거뒀다는 것이다. 1916년생으로 환갑을 7개월쯤 남겨 둔 시점이었고, 46년 대구의 ‘죽순’ 동인으로 시조를 쓰기 시작한 지 꼭 30년이었다.

이영도는 몇 해 전 생애 가장 소중했던 두 사람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20년 동안 이영도의 가슴속에 사랑의 불꽃을 심어 줬던 유치환, 그리고 이영도를 시조의 세계로 이끌어 68년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를 펴내기도 했던 오빠 이호우였다. 유치환은 67년 2월 13일 부산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숨을 거뒀고, 이호우는 70년 1월 6일 뇌출혈로 쓰러지더니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기이하게도 이들 세 사람은 똑같이 환갑을 앞둔 만 59세를 몇 달씩 전후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이영도의 외동딸도 어머니의 20주기를 지낸 뒤 똑같은 나이에 사망했다).

경북 청도에서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성장해 스무 살에 출가한 이영도는 딸을 낳은 뒤 얼마 후 남편과 사별하면서 평탄치 않은 삶을 시작했다. 겨우 스물한 살 때였다. 한동안 시댁과 친정의 신세를 지기는 했지만 두 식구의 생계는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므로 이영도는 해방이 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의 가사 교사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유치환은 두어 달 전 같은 학교의 국어교사로 부임해 있었다.
서른일곱 한창 나이 때인 유치환의 가슴속에 스물아홉의 청상과부 이영도는 하늘에서 막 내려온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으로 아로새겨졌다. 유치환은 그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들을 편지에 담아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낸 편지의 구구절절이 한결같이 ‘사랑의 시’였다. 하지만 유치환은 처자식을 거느린 한 가정의 가장이었기에 설혹 이영도의 마음이 흔들렸다 해도 그들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결실을 맺는 것은 당시로선 거의 불가능했다.

유치환은 3~4년 뒤 통영여중을 그만두고 대구로, 부산으로 학교를 옮겨 다니지만 편지 공세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영도는 50년대 후반 통영여중 교사직을 내놓고 부산으로 이사했고, 유치환은 3~4년 뒤 부산의 경남여고 교장으로 자리를 옮겨 두 사람은 똑같이 부산에서 생활하게 되지만, 이들이 해후했는지 어쨌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유치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이영도 역시 서둘러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거처를 옮긴 사실로 미뤄 그의 죽음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유치환의 편지 일부가 공개됐을 때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삭막한 세상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플라토닉 러브’라 칭송해 마지않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결국은 ‘불륜’이 아니냐고 맞섰다. 하지만 생전의 이영도가 ‘그 일’에 대해서는 늘 희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던 것처럼 누가 어떻게 생각했든 그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