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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작가 홍석중씨, 소설 '황진이'로 만해문학상 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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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경림·고은·조태일·민영·김지하, 소설가 현기영·이문구·송기숙·박완서…. 모두 역대 만해문학상 수상자들이다. 이렇든 국내문단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에게 주어졌던 이 상이 올해는 북한작가 홍석중(61)씨에게 돌아갔다. 올해로 19회를 맞았으니 이 상의 연륜도 이제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수상작은 소설 ‘황진이’다. 이 작품은 2002년 북한에서 발표됐고, 지난해말 국내에 수입돼 대형서점 등에서 판매되고 있다.

분단이후 남측의 주요 문학상을 북의 현역작가가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알다시피 작가를 당장 인터뷰할 방법이 없었다. 대신 문학평론가 최원식 교수(인하대 국문학과)를 만나 과연 홍석중이 어떤 작가인지 귀동냥했다. 최교수는 최근 계간문예지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황진이』에 대한 작품론을 발표했고, 만해문학상을 주관하는 창작과비평사의 주간이기도 하다.

홍석중씨에게서 우선 눈길을 끄는 점은 남북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받는 대하소설‘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의 친손자라는 사실이다. “홍명희 선생의 장남이 신문기자 출신인 홍기문이고, 차남이 홍기우라고, 위당 정인보 선생의 사위에요. 혼반(婚班)이라는 말이 있죠. 서로 혼인을 맺을 만한 명문집안이라는 것이죠. 당색은 좀 달랐어요. 홍명희 집안은 노론, 정인보 집안은 소론의 명문이었어요. 사실 그 정도 차이가 큰 문제는 아니었겠죠. 홍명희 같은 분은 신간회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이끌 만큼 좌파와 우파에 두루 통하는 인물이었으니까. ”

홍명희는 1948년 월북, 북한 정권에서 부수상까지 역임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그의 작품이 40년 가까이 금서로 묶여있었다. 홍명희의 큰아들 홍기문(1992년 사망) 역시 북한에서 이조실록을 번역하고 사회과학원장을 지내는 등 국학연구에 이름을 떨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홍기문의 아들 가운데 장남 홍석형은 남한의 장관급인 정무원 국가계획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엘리트 관료로 활동 중이고, 차남이 바로 홍석중이다. 한마디로 북한에서도 명문가 출신이다.

이런 사료적인 정보를 넘어 그에 대한 육화된 얘기가 흘러나온 것은 89년 북한을 방문했던 소설가 황석영씨를 통해서다. 현재 황씨는 영국 런던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머물고 있다.

“저도 황석영씨에게서 주로 얘기를 들었죠. 아주 친했다고 해요. 곧잘 모여서 이런저런 서로 답답한 얘기를 막역하게 주고받은 모양이에요. 술이요? 북쪽 사람들은 술도, 담배도 엄청 한다고들 하잖아요. ”

실제로 황씨의 북한방문기에는 홍석중을 포함, 선배격인 최승칠·후배격인 남대현(북한작품답지 않게 연애묘사가 진하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청춘송가’의 작가다)등의 북한작가와 어울려 술잔을 기울인 추억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한때 국내 언론에는 그의 숙청설이 보도되기도 했지만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최교수는 “궁금해서 황석영씨에게 물었더니 ‘원체 집안이 좋아서라도 그럴 리가 없다’고 하더라”고 했다.

▶ 국내 출판사인 대훈서적이 평양 문학예술출판사에서 펴낸 책을 직수입해 시중에서 판매하고 있는 소설『황진이』의 표지.

『황진이』의 책날개에 실린 연표에 따르면 홍석중씨는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했고, 70년 단편데뷔작 발표 이후 79년부터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 꼽히는 ‘높새바람’은 90년대초 국내에서도 출간된 적이 있다. 16세기 중종반정과 삼포왜란을 배경으로 실존인물과 이름없는 민초들이 두루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장편 역사소설이다. 일종의 시대극이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지만, 최교수는 『황진이』를 북한문학에서 전례없는 ‘새로운 역사소설’로 평가한다.

“벽초의 ‘임꺽정’같은 작품은 청석골의 두령들이 집단적 주인공인 작품이에요. 이런 의적들이 혁명가냐 아니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아무튼 당시의 지배체제와 대결하는 세력인 것은 맞죠. 이런 주인공을 통해 사회개혁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 사회주의 역사소설의 전형인데, 이와 달리 『황진이』는 뚜렷한 한 개인이 주인공이에요. 민족을 구원하거나 계급을 영도하는 영웅이 절대 아니죠. 기생이면서 여성인 주인공은 권력순환의 외부에 자리한 일종의 방외인(方外人)입니다. 이런 방외인의 절절한 내면을 그려내는게 이 작품의 주된 줄기에요. 기법상으로도 역시 곳곳에 독백이나 일기같은 문장형식을 삽입해서 3인칭 서사의 평면성을 깨뜨립니다. 작품을 읽어보면 역사나 계급 같은 건조한 것만을 훑어내려가는 문학에 대한 강한 염증이 느껴져요. 이전까지 북한 문학을 지배해온 형식과 내용에 대한 강한 도발인 셈이죠.”

『황진이』는 흔히 알려진 서경덕과의 사랑 얘기가 아니다. 극중에서 송도(개성)의 양반집안의 딸로 태어난 황진이가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파혼을 당한 뒤 스스로 기생이 되어 양반가의 남성들을 두루 만나는 줄거리 한편으로 집안의 종으로 어린시절을 함께 보낸 가공인물‘놈이’와의 비극적인 사랑이 얹혀진다. 이제는 사전에서나 찾아볼법한 우리말 토속어가 풍성하게 등장하고, 황진이의 고독한 내면풍경에 대한 묘사도 강렬하다. 사랑얘기인 만큼 소위 ‘야한 장면’도 등장하지만 최교수는 “야한 걸로 치면 남한 소설만 하겠냐”고 했다.

▶ 북에서 펴낸 500여쪽 분량의 소설『황진이』에는 이같은 컬러삽화 9점이 곁들여져있다.

“일전에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김일성대학 문과대 학장을 만났는데, 만해 한용운을 얘기하더라고요. 깜짝 놀랄만한 변화죠. 만해는 그동안 북에서 전혀 취급하지 않던 작가거든요. 북한의 문학연구에서도 어떤 변화가 벌어지고 있고, 작품으로는 『황진이』같은 게 나오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것이 과연 북한문학 전체의 변화를 대변하는 것인지, 홍석중이라는 한 개인의 특출함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요. ”

최교수는 흥미롭게도 ‘창작과 비평’에 실은 글에서 『황진이』를 구한말 멕시코 이민사를 소재로한 김영하씨의 소설‘검은 꽃’과 나란히 견주어 논했다. 각각 60대와 30대라는 작가의 나이 차이도 그렇지만, 김씨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신세대 문학의 대표선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퍽 파격적인 발상이다. 최근 인기를 끈 ‘다모’나 ‘대장금’같은 퓨전사극처럼 이 두 편의 소설이 남과 북에서 동시에 새로운 역사감각을 보여준다는 것이 요지다.

“김영하씨는 역사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한 신세대이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새로운 역사의식이 엿보여요. 벽초 홍명희식의 역사소설도, 춘원 이광수식의 역사소설도 아닌 새로운 길이지요. 홍석중의『황진이』 역시 그의 할아버지 홍명희식의 역사소설을 해체하는 작품이에요. 표면상 소통이 단절된 남과 북이 시대의 호흡을 같이 한다는 게, 경이롭지 않나요.”

최교수는 『황진이』가 북에서도 출간된 황석영씨의 ‘장길산’같은 작품의 영향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조심스레 내놨다. 『황진이』의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이전의 북한문학에서는 보기 힘든 요소라는 것이다.

한편 만해문학상 심사위원단은 “탁월한 역사적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소설적 서사의 진수를 보여주었으며, 사실과 야사, 속담과 살아있는 비유, 민중적 비속어와 품위있는 시적 표현을 풍성하게 구사하는 가운데 남북한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융화함으로써 분단을 벽을 뛰어넘어 민족 문화유산의 수준을 제고했다”고 수상이유를 밝혔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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