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조지훈·최불암·진념 … 50년대 대폿집 외상장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사직골 대머리집의 외상장부.

문인 조지훈·최일남, 기자 홍두표·최종율, 방송인 최불암·오지명, 공무원 진념·….

1950년대 말부터 62년까지 작성된 ‘사직골 대머리집’의 외상 장부 3권에 나오는 사회 저명인사들이다. 대머리집은 서울 세종로 정부 종합청사 뒤편 현재의 서울경찰청 맞은편 골목에 있던 대폿집. 1910년 이전에 문을 열어 78년 10월 문을 닫았다. 잡지 ‘문화정보’ 86년 5월호는 “납작한 양기와집으로 마당도 별로 없는 안채와 소위 술청이라고 할 수 있는 몇 칸 안 되는 홀이 있고, 거기에는 칠도 제대로 안 한 길쭉한 탁자와 의자가 있는 대폿집”으로 묘사했다.

이 집의 간판은 ‘명월옥(明月屋)’이지만 주인의 숱 없는 머리를 ‘공산명월(空山明月)’에 빗대 단골들은 ‘대머리집’으로 불렀다. 가게가 문 닫을 당시 대머리집 사장 이종근씨는 물론이고 그에게 가게를 물려준 장인(고 김영덕)도 모두 이마가 훤했다고 한다.

대머리집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문화인·언론인·관료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는 ‘문화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이 집을 드나들던 손님은 신문사·방송국 기자들이었다. 문인과 근처 중앙청에 근무하던 공무원들도 단골이었다.

대머리집은 후한 외상 인심으로 장안에서 유명했다. 손님이 가게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으면 가로 60㎝, 세로 40㎝의 흑판에 하얀 분필로 쓴 메뉴판을 주인이 들이밀었다. 메뉴는 조개탕·파전·동그랑땡·빈대떡·꽁치구이·은행·호박부침 등이었다.

장부는 외상을 달아놓은 사람의 이름과 소속 기관, 외상 금액을 깨알같이 적어 놓았다. 이름 모르는 손님에게도 외상은 야박하지 않아 주인 이종근씨는 ‘필운동 건달 X천환’ ‘대합조개 좋아하는 人 X천환’ 등으로 기록했다. 외상값은 대부분 1000환에서 3000환이고 회식을 한 경우 1만환이 넘기도 했다.

이번에 공개된 장부에는 약 300명, 연인원 700~800명의 이름이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다. 외상값을 갚은 사람의 이름 위에는 X 표시가 있다. 남재희·손세일(전 국회의원), 조용만(고려대 교수), 이구열(미술평론가·당시 경향신문 기자) 등 정계·학계 인사와 김기팔·박재삼·이성부·정현종 등 문인이 등장한다. 기자로는 김중배·이규태·염재용(횡보 염상섭의 아들)·강성구 등이, 방송인으로는 박근형·백일섭·이순재·변희봉·배한성·황인용·박병호 등의 이름이 나온다.

이종근씨는 78년 폐업 후 이민을 가면서 단골이던 극작가 조성현씨에게 이 장부를 넘겼다. 7월 30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막할 ‘광화문 年歌(연가):시계를 되돌리다’전에 장부가 공개된다.

박태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