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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팔만대장경’ 살려낸 김영환 장군, 지하에서 통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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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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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를 만든 사람으로 유명한 고 김영환 장군. 그의 맏조카인 김태자(65·사진) 전 세종솔로이스츠 이사장이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책의 일부 내용 중 작은아버지 김영환 장군의 기록이 누락된 부분을 바로잡아주기 바란다”며 <월간중앙>을 찾아왔다.

공비소탕 위해 사찰 폭격령 받았지만 끝까지 거부
최근 문화재청 발간 책에서‘부하의 공적’으로 둔갑
문화재청에서 엉터리내용 싣자 김 장군 유족들 명예 찾기 나서 공적비 세운 해인사에서 ‘김영환 공로’ 확인

지난해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 내용 중 상당수가 김영환 장군의 명예를 손상하고 역사를 왜곡한 흔적이 많아 한시라도 빨리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

2시간 동안 진행된 김씨의 격정토로를 담았다.

김영환 장군은 누구인가

1921년 출생.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5월 공군을 창설한 7명 중 한 명이자 역시 7인의 한 명으로 제7대 국방부 장관 및 1, 3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고 김정렬 장군의 친동생이다.

앞서 1946년 미 군정청 정보국에 근무할 당시 유창한 영어로 김정렬 장군과 함께 미군 측에 한국 공군 창설의 필요성을 설파해 공군 창설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공군비행단 참모장에 이어 1951년 공군 대령으로 진급했다. 6·25전쟁 당시 제10전투비행단장을 지내며 일본 무스탕기(F-51)로 32회 출격했다. 1951년 8월 해인사 폭격을 거부한 주인공으로 2002년 해인사 입구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졌다. 그는 특히 6·25전쟁 당시 공군 전투 조종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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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팔만대장경, 고 김영환 장군

그가 김정렬 장군의 아내이자 형수인 이희재 여사에게 “형수가 입고 있는 빨간 치마 색깔이 좋으니 머플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만들어준 머플러를 매고 다닌 이후 ‘빨간 마후라’는 공군의 상징이 됐다.

별명이 ‘RED BARON’일 정도로 비행기 전체를 빨간색으로 칠하고, 비행기를 탈 때도 ‘빨간 마후라’를 두른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전투조종사였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Manfred Von Richthofen)을 존경했던 김 장군은 그를 따라 ‘빨간 마후라’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4년 3월 34세의 나이에 비행 중 실종됐다.

김태자 전 세종솔로이스츠 이사장. 그는 제7대 국방부 장관과 1, 3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고 김정렬 장군의 맏딸이자 공군 전투조종사들의 상징이 된 ‘빨간 마후라’ 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고 김영환 장군의 맏조카다. 1963년 도미해 현재 미국 뉴저지에서 살고 있는 김씨가 최근 급히 귀국했다.

지난해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라는 책에서 해인사를 지킨 주인공 이야기(205~211쪽)에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 관련 기록은 아예 누락되고 그 부하직원이던 장지량 장군(당시 중령· 전 공군참모총장)의 이야기만 실려 있어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김씨가 <월간중앙>을 찾아와 밝힌 역사적 왜곡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김영환 장군은 김정렬 장군과 함께 공군을 창설한 7인 중 한 명이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김영환 장군은 공비 소탕을 위해 경남 합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끝까지 거부해 해인사의 장경판전(국보 제52호)과 고려대장경판(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름. 국보 제32호)을 지켜낼 수 있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서 해인사 장경판전과 고려대장경판을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것을 계기로 조계종이 김영환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해 2002년 6월17일 해인사 입구에 김영환 장군 공적비를 세웠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이런 역사적 사실과 달리 해인사 폭격을거부한 공적자로 장지량 장군만 언급한 것.

문화재청이 당시 생존자인 장지량 장군의 증언과 <나의 수기,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2001)와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2006) 등 장 장군이 펴낸 2권의 회고록만 토대로 해서 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 장군의 회고록에는 “내가 해인사 폭격을 명령한 미군을 설득해 해인사의 소중한 유물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적혀 있다.

장 장군이 회고록에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계기는 조계종이 해인사 폭격 거부 공적비 건립을 추진하면서 생존자들을 통해 유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김 장군의 직속부하로 공군에 있던 장지량 장군에게도 문의했던 것. 김씨 주장에 따르면 “장 장군은 공적비가 세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조계종 측에 해인사 폭격 거부 때 자신의 공도 있으니 공적비에 자신의 이름도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공군, “역사왜곡 진위 최종 검토작업 중”

이에 조계종은 장 장군의 증언에 따라 추진되던 공적비 건립계획을 일시 중단하고 재검토를 했다. 그러나 당시를 기억하던 생존 주민과 김영환 장군의 옛 전우들의 증언을 토대로 장 장군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기존 계획대로 2002년 김영환 장군의 공적비만 세우게 된다.

6월23일자 일부 언론에는 경남도청이 2011년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을 준비하면서 해인사 폭격을 거부한 공적자로 김영환 장군과 장지량 장군을 꼽고, 생존한 장 장군을 명예추진위원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그 유족에게 명예도민증을 주는 것을 검토 중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김씨는 “공군과 문화재청·경남도·해인사 등을 찾아 다니며 관계자들을 일일이 만나 진정서를 제출하고 지난 몇 년간 준비한 자료를 보여주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월간중앙>에 풀어 놓은 자료는 책상 위에 수북이 쌓였다.

문화재청에 낸 진정서부터 공군역사자료발굴위원회가 만든 종합 보고서, 장지량 장군 회고록과 김정렬 장군 회고록을 공군사와 조목조목 비교분석한 것, 최근의 언론 기사 등이 깔끔하게 파일로 정리돼 있었다. 이들 자료에는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책의 해인사 폭격 거부 공적 내용이 상당수 왜곡됐다”는 김씨의 주장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다음은 김씨와 일문일답이다.

김태자 1944년 2월 출생.

서울대 음대에 다니다 1963년 도미, 줄리아드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부터 한국음악재단(Korea music Foundation)에서 한국 음악인들을 돕는 일을 해왔다.

1994년에는 ‘음악의 나토(NATO)’라는 찬사를 받으며 뛰어난 연주로 세계 무대를 누비는 세종솔로이스츠를 창단해 2004년까지 단장과 이사장을 맡아 10년을 봉사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대진 교수, 백혜선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등이 세종솔로이스츠 출신 음악인이다.

현재 미국 뉴욕에 있는 한국커뮤니티재단(KACF, Korean American Community Foundation)의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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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17일 경남 합천 해인사 입구에 세워진 김영환 장군 공적비.

-문화재청 책자에 실린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못됐다는 겁니까?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 208~209쪽에 보면 ‘500~600명으로 추산되는 인민군 1개 대대가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식량 탈취가 목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며칠만 지나면 인민군들은 해인사 밖으로 빠져나올 것이고, 그때 폭격한다면 적도 소탕하고 해인사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이러한 사실을 미 6146 고문단 작전장교에게 설명하자 그는 왜 작전명령을 따르지 않느냐며 불만을 표시, 장지량은 시간을 계속 끌었고 결국 날이 어두워져 자연스레 출격이 중단됐다’고 적혀 있어요. 1951년 8~9월이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 시기였습니다. 장 장군은 당시 작전참모로 있었어요.

작은아버지께서는 장 장군의 직속상관으로 비행단장이셨죠. 6·25 때는 우리나라 공군력이 매우 빈약할 때예요. 전쟁 직후 전투비행기라고는 모두 합쳐 10대도 없을 때였죠. 조종사도 스무 명 남짓이었고요. 조종이 미숙한 우리 조종사들이 자꾸 사고를 당해 사망하자 당시 초대 공군참모총장이던 아버지가 미 공군사령부에 “이 상태에서 우리는 도무지 전투를 할 수 없다.

한국 공군은 우선 훈련을 하겠다”고 해서 제주도로 가서 훈련하다 1951년 6월30일 다시 사천기지로 옮겼답니다. 그런데 장 장군이 미군의 명령을 거부해 폭격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죠. 우리 공군은 그때 미군의 지시를 받지 않았어요.”

-장 장군의 회고록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확실히 있나요?

“최근 윤응렬 장군이 쓴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고찰과 소견’이라는 자료집에도 명백히 나와 있고, 지금 살아계신 숙부의 전우들이 증명한 이야기들도 있어요. 올 초 문화재청 책이 나오면서 장 장군의 위증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공군 전우들이 직접 공군역사자료발굴위원회를 만들어 조사한 내용으로 보고서도 냈습니다.”

-공군역사자료발굴위원회는 장 장군의 회고록 파문으로 구성된 것인가요?

“제가 문화재청의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 책이 나오자마자 지난해 8월 문화재청과 공군참모총장 앞으로 진정서를 냈어요. 공군 측에서 연락이 없다 그해 10월21일 지금의 이계훈 새 참모총장이 오시면서 특별위원회를 조직해 종합보고서가 나오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윤응렬 장군 등 퇴역 장군들이 나서서 문제제기했으니 참모총장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6·25전쟁 때 직접 출격했던 공군 장군 14분을 위원으로 위촉해 진상조사작업을 벌인 거죠. 그분들 나이가 전부 80이 넘으셨어요. 위원회의 검증 대상 기간은 1948년 4월1일부터 6·25전쟁이 끝난 1953년 7월27일까지예요.

살아 있는 증인들의 회고와 기존 공군 역사 등을 참조해 조사한 내용이 지난 4월16일 최종적으로 정리돼 나온 겁니다. 얼마 전 이계훈 총장이 이 보고서에 최종 사인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 보고서에도 장 장군이 주장하는 내용이 전혀 근거 없다는 증거자료가 자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 얼마 전 진상규명을 위해 해인사에도 다녀오신 것으로 아는데요.

“공적비를 세울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계셨고, 지금은 해인사 총무국장으로 계신 심우 스님을 만나뵈었죠. 심우 스님 증언에 따르면 장 장군이 찾아와 내가 폭격을 거부하자 윌슨 대령이라는 사람이 화가 나서 ‘I will cut your neck’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너희가 명령을 거부하니 이승만 대통령한테 말해 너희 목을 자르겠다’고요. 이 내용은 그의 회고록과 문화재청 책에도 나와 있어요. 이 이야기를 미군 측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진노해 전투비행단장인 우리 작은아버지와 참모였던 자신을 대포로 포살하라고 했다고 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그때는 우리나라 조종사들을 한 명이라도 아껴야 하는 판국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비행단장과 참모를, 그것도 대포로 포살하라고 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게다가 그 일이 있은 후 군법회의에서 징계받은 작은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이 비행기를 끌고 나가 해인사에서 깊은 산속으로 철수한 인민군에게 폭격을 감행했다는 거죠. 심우 스님께서 장 장군에게 ‘그럼 기록이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기록을 못 갖고 오더래요. 그래서 해인사 측에서 원래 계획했던 대로 2002년 작은아버지 공적비만 세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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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문화재청이 발간한 책에는 해인사 폭격을 막은 인물로 김영환 장군은 빠지고 장지량 장군(오른쪽)만 소개돼 있다.

문화재청 책에는 아예 김영환 장군 공적 빠져

-당시 해인사 폭격명령과 미군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죠?

“앞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미군 명령이 아니라 진주 경찰에서 우리 공군에 연락이 온 것입니다. 지리산에 공비들이 너무 많으니 공비토벌작전을 지원해 달라고요. 순전히 우리 쪽 요청에 의해서였어요.”

-그런데 왜 일부 언론매체나 문화재청이 그런 사실을 확인 없이 썼을까요?

“보통사람들이 생각할 때 6·25 때니 당연히 미군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당시 계셨던 분들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하시거든요. 미군이 들어와 우리를 도와줬으니 ‘미군한테 명령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김영환 장군 모르게 윌슨 대령과 장 장군이 승강이를 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닙니까?

“윤응렬 장군 보고서에도 나오지만, 당시 작전참모가 미군 상부층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만약 이야기를 했다면 저희 아버지나 편대장이셨던 작은아버지 정도였겠죠. 또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당시 어느 지역을 공격하려면 먼저 정찰기를 띄운답니다.

정찰한 이후 인민군이 눈에 띄면 정찰기가 먼저 연막탄을 떨어뜨린대요. 그러면 전투기가 연막탄이 터진 곳을 공격하는 겁니다. 지리를 모르면 거기가 해인사인지 초등학교인지 모르는 거죠. 그때도 해인사 마당 한가운데 연막탄이 떨어졌는데, 작은아버지가 그곳이 해인사인 것을 알아보시고 폭격을 피한 겁니다.

어머니가 보살이신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그곳이 절인 것을 눈치채셨던 거죠. 작은아버지는 해인사를 피해 뒷산을 폭격하셨어요. 다시 돌아가려면 빈 비행기로 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에라도 폭격하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주민들과 해인사 스님들이 ‘참 이상하다.

연막탄은 여기 떨어졌는데, 왜 뒷산에 가서 폭격이 떨어졌느냐’며 의문을 품었는데, 훗날 작은아버지가 해인사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런데도 장 장군은 왜곡된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 문화재청이 발간한 책은 시중에 배포됐나요?

“그게 제일 큰 문제예요. 전국에 있는 초·중·고등학교에 이 책을 배포한 겁니다. 4,000권을 찍어 2,500권을 배포했고, 나머지 1,500권은 서점에 푼 것입니다. 답답할 노릇이죠. 문화재청 쪽에 진정서를 낸 이후 어떻게 할 것인지 묻자 ‘진정서는 잘 받았다. 일단 공군에 의뢰해 보겠다’고 하고는 연락이 없어요.

공군 측에서 아직 공식 입장을 표명하지 않아 기다리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공군역사자료발굴위원회 보고서는 이미 4월에 나왔는데 참모총장 사인이 나지 않아 저도 무척 마음을 졸이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사인이 났다는 것 아닙니까?”

“공군의 최종 결론을 기다릴 뿐”

-공군의 공식 입장이 조만간 밝혀지면 문화재청은 책을 수거하겠네요?

“왜곡 사실이 밝혀지면 서점에 남아있는 책을 회수하고 그 부분만 다시 써서 전국의 학교에 재배포하겠다고 했어요. 약속을 지킨다면 명예회복은 되겠죠.”

- 6월23일 각 일간지에 경남도가 장 장군을 2011년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 준비위원장으로 위촉하고 그 유족들에게도 명예도민증을 주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요. 지금 경남도 입장은 어떻습니까? 이 논쟁을 알고 있습니까?

“얼마 전에 안 것으로 알고 있어요. <경남신문> 기자 한 분이 이 축전 준비 기사를 취재하다 해인사 관계자의 이야기와 축전 진행 실무를 맡은 합천군 쪽 말이 달라 의문을 제기하고 김영환 장군의 유족인 저한테까지 연락했던 거죠. 제가 이 말을 전해듣고 당장 해인사로 찾아갔는데, 그때 마침 경남부지사가 그 축전 준비로 상의하러 오셨더라고요.

해인사 주지스님이 저보고 그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해서 그냥 앉아 있었죠. 그 자리에서 주지스님이 ‘장지량 장군의 말은 거짓이다. 공군참모총장까지 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추진위원회에 들어갈 자격도 없는 사람이고, 들어간다면 국제적 망신’이라고 하시더라고요.”

-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겠네요?

“부지사가 와서 들었으니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겠죠. 경남도에서 바로 공군 측에 조회했대요. 공군이 아직 검토 중이라고 말해서 경남도도 기다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만간 결론이 나면 도청도 조치를 취하겠죠.”

(경남도의 이인도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준비기획단장은 <월간중앙>과 전화 통화에서 “앞으로 축전을 하기까지 2년이라는 기간이 남았기 때문에 무리하게 서두르지 않겠다”며 “공군이 검토 중인 해인사 폭격 거부 공적 진위 여부에 따라 장 장군의 명예준비위원장 추대와 그 유족들에게 명예도민증을 주는 문제를 재검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김영환 장군의 조카이신데 이번 해인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작은집에 자녀가 없어 제가 나선 것입니다. 저희 집도 3남2녀지만 작은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맏이인 저밖에 없어요. 작은아버지는 1954년에 돌아가셔서 제 동생들은 잘 모르죠.

지금 미국 뉴저지에 살고 계신 작은어머니께서도 제게 편지를 쓰셨어요. 윤응렬 장군을 만났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네가 맏조카이니 나서서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다오. 작은아버지 영혼도 기뻐하실 것’이라고요.”

-장지량 장군 측에서도 이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아나요?

“당연히 알고 있죠. 장 장군의 큰딸이 뉴저지에 살아요. 저와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냈죠. 지난해 그 딸을 만나 ‘아버님께서 자서전 쓴 것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해요.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은 것 같아 전후 상황을 설명하고 아버지께 효도하는 셈치고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언론에 잘못된 사실이 유포되는 것을 막으라고 했더니 그 이후로 연락이 없어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다음 날 아침 김씨는 다시 전화를 걸어와 “유족의 명예에 앞서 우리 역사의 잘못된 왜곡사실을 꼭 바로잡아주기를 바란다”고 신신당부했다.

‘해인사 폭파 거부 공적 논란’ 진실의 키는 공군이 쥐고 있다. 공군역사자료발굴위원회의 보고서를 검토하는 공군 측의 최종 입장이 어떻게 정리되느냐에 따라 김씨의 간절한 바람이 실현될 수 있을지 여부가 달려 있다. 이번 사태의 진실 규명은 ‘우리 역사 바로 찾기’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미군 윌슨 대령은 해인사 폭격 사실 자체를 몰랐다”

전 공군작전사령관 윤응렬 장군 증언

6·25전쟁 때 전투 조종사였던 윤응렬 장군은 대한민국 공군 초창기부터 장지량 장군이 군을 떠날 때까지 간부로 봉직했다. 그는 ‘해인사 폭격 거부 공적’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최근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고찰과 소견’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소개했다.

다음은 윤 장군의 보고서 ‘팔만대장경 수호 진상’(13~16쪽)이라는 부분에 나온 내용 중 일부다.

“우리 공군은 1951년 8월17일부터 9월18일에 걸쳐 지리산지구 공비 토벌 경찰부대 공중지원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경찰이 공비 토벌을 담당했고, 지리산지구 최치환 전투경찰부대장이 사천기지를 방문해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51년 7월23일 진주경찰서에서 군·경(軍警) 관계관이 협의해 공비 토벌 공중지원작전이 단행됐다.

(중략) 문제의 그날도 전투경찰대의 지원 요청을 받은 우리 공군은 김영환 장군을 편대장으로, 무장한 4대의 F-51 편대가 즉격 출격했다. 목표 상공에서 전투경찰대와 정찰기로부터 공격목표를 지정받았는데 그것이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는 해인사임을 확인한 김 장군이 해인사를 공격하지 않고 다른 목표를 찾아 공격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중략) 우리 공군이 단독으로 수행한 이 작전은 미 공군의 작전명령서로 정확한 목표를 지정받고 출격한 것이 아니라, 전투경찰대가 요청한 지역 상공에서 경찰대와 우리 정찰기가 제시한 목표를 공격하는 것이다. 고문단의 작전명령이나 출격명령은 있을 수도 없었고, 출격 전에 목표가 해인사라고 정해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중략) 몇 년 전 필자는 당시 장지량 장군이 폭격을 거부하면서 승강이를 했다는 문제의 윌슨 대령을 만날 기회가 있어 ‘해인사작전’에 대해 물어보았다. 의외로 그는 우리 공군이 해인사를 공격했는지 안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과연 언쟁으로 격앙된 상황에서 멱살을 잡히고 그 자신 또한 우리 대통령에게 보고해 ‘출격명령을 거부하면 너희 목을 날려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윌슨 대령에 따르면 그가 상대했던 한국 측 인사들은 김정렬 총장과 장덕창 단장, C-47을 같이 조종한 장성환 장군이었고 작전협의나 한국 조종사들의 출격은 영어가 능통한 김영환 장군이 맡았으며, 한·미 간 연락장교 역할은 항공군의관 계원철 소령이 담당했다고 말하면서 그 외에는 누구와도 공식 접촉이나 협의를 한 바가 없다고 했다.

“50년 전 일은 생존자만이 알 뿐이다”

부하였던 장지량 장군 측의 항변

7월13일 장지량 장군과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장 장군의 조카라고 밝힌 A씨는 “요즘 숙부의 건강상태가 안 좋아 직접 통화할 수 없다”며 “이미 정부 산하기관인 문화재청이 준 감사장도 받았고, 그쪽에서 발간한 책에도 해인사 폭격을 막은 사람은 장 장군이라고 적혀 있다.

50여 년 전 일이고, 생존자는 장 장군뿐인데 누구 말이 맞겠느냐”며 장 장군의 입장을 대변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 책을 만들 당시 생존자인 장지량 장군의 증언을 중심으로 조사했기 때문에 김영환 장군 이야기가 빠졌던 것 같다”며 “공군의 공식 입장이 밝혀지면 사후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책이 발간되기 훨씬 이전인 2002년 이미 해인사 입구에 김영환 장군 공적비가 세워졌던 사실을 몰랐느냐”는 <월간중앙>의 질문에는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월간중앙>은 최종적으로 공군 관계자에게 전화해 이 논란과 관련한 공식 입장을 물었다.

공군에 따르면 “공군역사자료발굴위원회가 낸 보고서에 얼마 전 참모총장 사인이 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진위 여부에 대해 최종 검토 중이기 때문에 보고서 내용이 진실이라고 명확하게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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