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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27) 황인숙 → 이진명 시집 『세워진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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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용하여라, 한낮에 나무들 입 비비는 소리는, 마당가에/ 떨어지는 그 말씀들의 잔기침. 세상은 높아라. 하늘은 눈이/ 시려라. 계단을 내려오는 내 조그만 애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때처럼. 눈시울이 붉어라. 만상이 흘러가고 또/ 흘러오고. 조용하여라. 한 해만 살다 가는 꽃들.”

이렇게 시작되는 이진명 시 ‘청담(淸談)’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이 새라새롭다. 나뭇잎 하나가 솔바람에 몸을 싣고 팔랑팔랑 날아 떨어지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히 지켜보게 된 것 같달까. 길지 않은 그 순간이 지나고 나는 긴 숨을 ‘후~!’ 내쉬었다.

그 뒤 나온 이진명의 첫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는 과연 청담의 향연이라 할 만했다. 맑고, 고요하고, 나직하고, 단아한, 그 시선의 결, 마음의 결. 마치 빗방울이나 바람이나 물결의 화석 같은 그 시들을 가슴의 퇴적층에 간직하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진명의 얼굴은 웃는 상이다. 그래서 샐쭉하거나 짜증을 낼 때도 나는 알아채지 못하고, 그의 마음은 늘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려니 생각했다. 그가 두 번째 시집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를 낼 무렵 술자리에서 이런 토로를 하기 전까지는.

“혼자 있을 시간이 없어서 너무 외로워.”

같은 시인으로 서로 이해 깊은 남편과 똘똘한 딸아이 하나, 너른 텃밭이 딸린 집. 결혼을 한 바에야 시 쓰는 여자로서 썩 괜찮은 처지라 자인하면서도 그랬다. 뭉게구름 흘러가는 호수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들꽃들, 저 잔잔한 산기슭이 실은 화산일 수도 있다. 하긴 에어컨의 냉기를 만드는 건 강력한 열이다. 이진명 시의 서늘한 고요는 시인 가슴의 마그마가 동력이리라. 그의 최근 시집 『세워진 사람』을 거닐면 종종 발밑이 들썩거리는 게 감지된다.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갑자기 알아차리게 된 즈음/외롭고 슬프고 어두웠다/나는 헌것이 되었구나/찢어지고 더러워졌구나/부끄러움과 초라함의 나날/모래밭에 나와 앉아 모래장난을 했다/손가락 사이로 모래를 뿌리며 흘러내리게 했다/쓰라림 수그러들지 않았다/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모래 흘리던 손 저절로 가슴에 얹어지고/머리는 모래바닥에 푹 박히고/비는 것처럼/비는 것처럼/헌것의 구부린 잔등이 되어 기다리었다”(‘모래밭에서’ 부분)

◆『세워진 사람』(창비, 2008)=이진명(54) 시인이 『단 한 사람』이후 4년 만에 내놓은 네번째 시집.

◆황인숙(사진)=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시 등단. 시집『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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