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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26) 김사인 → 황인숙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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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삶을 선하고 충만하게 치르는 높은 기술이 궁금하다면 가령 이런 시는 어떤가.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을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바람 부는 날이면’ 전문)

그의 두 번째 시집 『슬픔이 나를 깨운다』에 수록된 이 시를 읽으며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구김 없고 자신만만할 수가 있담. 두메 출신의 나로서는 언감생심 간담이 서늘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속이 다 시원하고 눈앞이 환해지면서, 나도 그 통쾌한 치마를 입어보고 싶어 마음이 스멀거렸다. 길고 품 넓은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벌판에 서서 가슴까지 부풀어오르는 바람을 맞고 싶었다.

이 뿐이겠는가. ‘비’ ‘말의 힘’ 같은 시들을 읽을 때 마다 나도 그 싱그러운 감각에 물들어 덩달아 철없고 순수해지는 기쁨을 누렸음을 고백해야 옳다. 황인숙은 그런 시인이다. 갓 튀긴 팝콘 만큼이나 감미롭고 싱그러운 그의 언어들은, 우리의 굳어진 감각을 교란하고 해방시키는 강력한 물리력에 해당한다. 그러한 시인의 타고난 에너지가 연륜과 더불어 비애와 적막과 연민의 표정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어느 지점, 한두 마디로 쉬 형언하기 어려운 마음의 착잡과 깊이의 어느 자리쯤에 서있는 것이 여섯 번 째 시집 『리스본행 야간열차』라고 나는 읽는다. 그러므로 초기의 시집들이 싱그럽고 발랄했다면 이 시집은 이제 따뜻하고 쓸쓸하고 우아하다. 아니 표현이 적절치 않다. 그는 발랄을 버리고 우아해진 것이 아니라, 발랄로서, 발랄의 지극함으로서 우아함에 이른 것이다.

그는 여전하다. 그가 “이 세상 몇 십년 살아도/ 내 세상 같지 않다는 얼굴로/ 나이 지긋한 양반이 간다”(‘흐린날’)고 하거나, “날씨의 절세가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이 텅 비는 것 같습니다”(‘하늘꽃’)라고 하면, 그 얼굴, 그 날씨가 여전히 손으로 만지는듯 생생해진다. 심지어 뒷표지의 글 “언젠가는 크리넥스 통에 만 원 짜리 지폐를 가득 채워 휴지처럼 뽑아쓰고 싶다는 농담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했었지.(이젠 그도 성에 안 차, 집 안에 현금인출기를 하나 들여놓고 뽑아 쓰고 싶다)” 같은 부분에서마저 비애에 앞서 그다운 익살이 유쾌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 유쾌함 한 곁으로 어느덧 죽음과 고독과 가난의 식구들이 쓸쓸하지만 평화의 얼굴을 하고 스며 있는 것이다.

그는 삶의 순간들을 선하고 아름답고 충만하게 치르는 높은 기술을 터득했는가 보다. 어떤 처지에서도 풀과 돌과 바람과 고양이와 좁은 골목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영혼의 기술을 그는 익히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얼마나 기적적인 권능이자 형벌일 것인가. 남루한 나날들이 견디기 어려울 때 독자들께서는 망설이지 말고 황인숙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혼자 오르실 일이다. 귀한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자명한 산책』 이후 4년 만에 펴낸 황인숙(51)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시집 제목 그대로 포르투갈 여행에서 건져 올린 낭만적인 시편들, 시인의 오랜 애착 대상인 고양이를 소재로 한 시편 등 57편이 담겨 있다.

◆김사인(사진)=1955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82년 동인지 ‘시와 경제’에 창간동인으로 참여하며 시쓰기를 시작했다. 『밤에 쓰는 편지』『가만히 좋아하는』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신동엽창작기금·현대문학상 등을 받았고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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