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그때 오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요절 예고한 ‘배호 사망설’ 소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1면

1968년 7월. 한 TV의 ‘가요일번지’ 프로그램 PD의 작업실에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배호씨가 정말 죽었나요?” 비슷한 질문이 50여 통이나 이어졌다. 이미 한 차례 대성통곡을 한 듯 목이 잔뜩 쉰 여성들도 있었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인기가수 배호가 지방 공연을 펑크내자 관객들이 흥분했다. 엉겁결에 나선 사회자가 “어제 병이 도져서 입원했는데, 그만…”이라고 둘러댔다. 좌중이 울음바다가 됐다. 소문이 번지자 방송국에도 확인전화가 몰린 것이었다. 물론 사망설은 사실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42년 4월 24일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난 배호(본명 배만금·사진)는 광복군 배국민씨의 장남이었다. 많은 독립투사의 자녀들처럼 그도 가난에 시달리며 자랐다. 12인조 배호 밴드를 결성해 서울 낙원동 프린스 카바레 등에서 명성을 떨쳤다. ‘도라지’란 말을 외국어처럼 살짝 굴리는 데뷔곡 ‘두메산골’은 독특했다. 그 자신도 “제 창법이 ‘참 건방지게 멋있다’는 말을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66년 신장염이 발병했다. 하지만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67년 3월 장충동 녹음실에서 취입할 때는 한 소절 부르고는 털썩 주저앉을 정도였다. 그날의 신곡이 바로 ‘돌아가는 삼각지’였다. 그가 노래한 용산의 입체교차로는 94년 철거되고 배호 노래비만 남는다.

71년 병세가 악화되자 병상에서 ‘0시의 이별’과 ‘마지막 잎새’를 녹음했다. 헐떡이는 숨결과 끓는 가래가 그대로 느껴지는 최후의 노래다. 공연 출연도 했다. “죽어도 노래하다 죽겠다”면서. 음악만 틀어놓고 무대에 그대로 서 있던 때도 있었다. 그해 11월 7일 배호는 운명했다. 병상 곁에는 1년 동안 떠나지 않고 간호해 주던 일곱 살 연하의 여성이 있었다. 죽기 하루 전 배호는 자신의 손목시계와 반지를 건네주면서 “안 가겠다”고 울부짖는 그녀를 설득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1일 예총회관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소복 입은 젊은 여인들이 수백 미터나 늘어섰다.

그가 떠난 지 38년. 노래방에선 여전히 배호 노래가 흘러나오고 인터넷에는 수백 개의 팬클럽이 활동하고 있다. ‘안개낀 장충단 공원’을 기리는 장충단 배호가요제도 매년 열린다. 배호 노래 중에 가사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31곡, 안개가 낀 것은 13곡이라고 한다. 가수 생활 5년에 300여 곡을 남긴 열정과 투혼의 삶. 노래는 멈췄는데 저 혼자 돌고 있는 LP 음반처럼, 지직거리며 영혼을 긁는 배호의 추억은 멈추지 않는다.

이상국(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