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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곁엔 인현왕후 먼발치엔 장희빈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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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호 22면

①왕은 27대인데 왕릉은 왜 40기인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능(陵)이다. 왕세자·왕세자빈·사친(종실로 왕위에 오른 왕의 친부모) 등의 무덤은 원(園)으로 불린다. 그 밖의 왕족 무덤은 여느 사람처럼 묘(墓)다. 조선왕조 500여 년 왕위에 오른 사람은 27명이다. 이 중 10대 연산군, 15대 광해군은 폐위됐다. 그래서 그들의 무덤은 왕릉이 아니다. 대신 나중에 왕·왕비로 추존돼 무덤이 왕릉으로 격상된 경우가 다섯 차례 있다. 성종·인조·헌종 각각의 부모가 그랬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의 부모도 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훗날 장조·헌경왕후로 추존됐다. 정조는 양아버지도 있다. 영조의 맏아들이자, 9살 어린 나이로 숨진 효장세자다. 사도세자가 숨진 뒤, 영조는 훗날의 정조인 세손을 죽은 맏아들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잇게 했다. 정조로서는 큰아버지가 양아버지가 된 셈이다. 이런 왕·왕비의 무덤을 모두 합하면 42기다. 이 중 태조 이성계의 원비 신의왕후가 묻힌 제릉과 2대 정종의 후릉은 북한 개성에 있다. 2기를 제외하고 남한에 있는 40기 전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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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수도권에 몰린 이유는.
-왕릉을 도성을 중심으로 40㎞ 안에 두도록 경국대전에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후손인 왕이 궁궐에서 하룻길로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효(孝)의 실천을 위한 입지로 해석된다. 상지영서대 이창환 교수는 “풍수만을 앞세웠다면 전국 이름난 곳에 왕릉이 퍼져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외는 있다.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은 사후 240년 만에 복위된다. 그가 묻혔던 무덤도 장릉으로 격상됐지만, 여전히 서울에서 먼 강원도 영월 그대로다. 추존왕 장조, 즉 사도세자의 융릉도 비교적 멀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아버지를 뒤주에 가둬 숨지게 하는 비참한 과정을 목격했다. 왕위에 오른 뒤, 최고의 길지로 꼽히는 곳을 골라 아버지의 무덤을 옮겼다. 정조가 행궁을 짓고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을 건설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효심 지극한 정조는 24년의 재임기간 동안 아버지의 무덤을 31번이나 찾았다. 그 자신도 아버지의 무덤인 융릉 바로 곁 건릉에 묻혔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지역에 자리한 목릉. 세 개의 언덕에 각각 자리한 14대 선조·의인왕후·인목왕후의 봉분이 하나의 능을 이룬다. 동원이강릉이 변형된 형식이다. 문화재청 제공

③왕릉의 이름은 누가 붙였나.
-왕·왕비가 숨진 뒤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새 왕이 정했다. 능호는 한 글자다. 태조 이성계만이 조선을 건국한 공을 기려 건원(建元), 두 글자가 붙었다. 겹치는 경우는 없다. 왕릉을 옮기더라도 능호는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은 지금의 영국대사관 부근인 서울 중구 정동에 있다가, 태종 이방원이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정릉동·정동 모두 정릉에서 나온 지명이다. 청량리의 홍릉수목원은 일제에 시해당한 명성왕후의 홍릉(洪陵)이 있던 자리다. 지금 홍릉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고종이 승하한 뒤 명성왕후를 이장해 함께 묻혔는데, 능호 역시 홍릉을 썼다. 죽은 이의 신분이 바뀌면서 무덤 이름이 바뀌는 경우는 있다.

예컨대 세자빈으로 숨졌다가 나중에 남편이 왕위에 오르면 왕후가 되고, 무덤도 능으로 이름이 붙여지는 원리다. 동구릉·서오릉·서삼릉은 능호가 아니다. 모여 있는 수를 헤아려 부르는 말이다. 동구릉이 동오릉·동칠릉이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④왕과 왕비는 함께 묻혔나.

-기본적으로 그랬다. 왕을 중심으로 보면 말이다. 혼자 묻힌 왕은 태조(건원릉), 단종(장릉), 그리고 중종(정릉)뿐이다. 성종의 둘째 아들인 중종은 반정을 벌여 연산군을 몰아낸 신하들의 힘으로 왕이 됐다. 38년이나 왕위에 머물렀지만, 강력한 왕으로 보기 힘들다.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는 남편이 왕위에 오른 지 7일 만에 왕비에서 쫓겨난다. 단경왕후의 아버지가 반정세력에 죄인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탓이다. 중종은 본래 제1계비 장경왕후와 함께 묻혔다. 이를 옮긴 것은 제2계비 문정왕후다. 나중에 아들 명종 때 수렴청정으로도 이름을 날린 왕비다. 풍수가 불길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렇다고 문정왕후가 중종과 함께 묻힌 것도 아니다. 옮긴 중종의 정릉(靖陵)이 지대가 낮아 거듭 물이 찼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태릉에 따로 묻혔고, 남편 대신 아들 명종의 강릉을 가까이 두게 된다. 중종과 세 왕후는 이렇게 도합 4개의 왕릉을 남겼다.

⑤함께 묻혔다면 봉분이 하나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조선왕릉의 봉분 형태는 다양하다.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각각 만들어 나란히 배치한 쌍릉, 하나의 능이되 각기 다른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배치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언덕의 위아래로 왕·왕비의 봉분을 배치한 동원상하봉릉(同原上下封陵) 등이 있다. 봉분이 하나인 합장릉도 물론 있다. 이 경우 내부의 석실은 분리돼 있다. 한 언덕에 왕·왕비·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삼연릉도 있는데, 헌종의 경릉이 유일하다. 왕이나 왕비가 혼자 묻힌 경우는 단릉이라고 부른다. 궁중 드라마에 곧잘 등장하는 숙종이 묻힌 명릉은 복합적인 형태가 특이하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봉분은 한 울타리 안에 쌍릉을 이루고 있고, 좀 떨어져 인원왕후가 단릉으로 묻혀 있다. 봉분은 셋이되 전체가 하나의 능이다.

⑥호랑이와 양 모양의 석물은.
-화강암으로 만든 석호·석양은 무인석·문인석·석마와 함께 조선왕릉마다 빠지지 않는 석물이다. 홍익대 김이순 교수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고 설명한다. 다만 용맹한 호랑이와 온순한 양을 번갈아 배치한 것이 음양의 조화를 꾀한 의도로 추측되고 있다. 앉고 선 자세가 교차되는 것도 이런 추정을 돕는다. 중국의 왕릉에도 석호·석양이 등장하는데, 조선 왕릉과 달리 봉분 앞에 도열한 형태라 역할이 다른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왕릉의 석호·석양은 봉분 주위를 바깥쪽을 향해 둘러싸고 있다. 외부로부터 왕릉을 수호하는 의미다. 그 생김새가 친근하고 해학적이기까지 한 것이 특징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성덕왕릉은 네 귀퉁이에 사자를 배치하기도 했다. 석사자 대신 석호가 나타난 것은 고려시대다. 석양 역시 고려시대 무덤에도 등장한 기록이 있다.

⑦참배하러 가는 길은 왜 두 겹인가.
-두 겹의 참도는 각각 신도(神道)·어도(御道)로 불린다. 둘 중 약간 낮고 좁은 쪽이 참배하러 온 왕이 다니는 길이다. 넓고 높은 길은 능의 주인인 죽은 왕을 위한 길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길을 구분한 것은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도 마찬가지로 두 겹이다. 제향을 드리는 곳인 정자각(丁字閣)은 죽은 자와 산 자가 교류하는 공간이다. 제향을 드린 뒤 돌아 나오는 것은 산 자다. 반대로 정자각 너머 봉분이 있는 언덕은 죽은 자의 공간이다. 조선왕조 말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격에 맞게 왕릉을 꾸민 고종·순종의 홍릉·유릉은 좀 다르다. 신도 양쪽에 어도가 있는 3겹 구조다. 정자각도 정(丁)자가 아니라 일(一)자 형태다. 또 조선 초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은 신도·어도의 구분이 없이 한 겹으로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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