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엘리트 직업, 70년대엔 시위대도 길 터줘”

중앙일보

입력 2009.06.16 00:44

업데이트 2009.06.16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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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44년차 버스기사 장이인(68) 할아버지가 15일 오후 서울 우이동 동아운수 차고지에서 출발을 앞두고 차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도훈 인턴기자]
15일 오후 서울 강북구 우이동 151번 동아운수 차고지. 이 회사 버스기사 장이인(68) 할아버지는 “이곳저곳 차로 돌아다니는 게 좋아 핸들을 잡았는데 벌써 48년이나 지났다”고 말했다. 그는 해병대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하면서 운전을 ‘천직’으로 삼게 됐다. 제대 직후인 1961년부터 택시 운전을 하다 9인승 승합차를 몰고 종암동~만리동 노선을 달렸다. 버스라고 하기에는 작지만 노선이 있는 과거형 ‘마을버스’였다.

본격적으로 시내버스와 인연을 맺은 건 66년. 25세 이상부터 나오는 대형 면허를 따고 버스 회사에 취업했다. 석관동에서 서울역을 오가는 버스였다. “당시 버스기사는 인기직업이었지. 나름대로 엘리트 대접도 받았지.” 시내에 자동차가 많지 않던 시절 버스는 서민들의 발이었다. “차가 좀 늦어도 승객들은 화를 내기는커녕 태워줘서 고맙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월급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넉넉했다.

당시 버스기사는 운전에서 정비까지 도맡았다. 60년대 운행되는 버스들은 주로 외국산 물품을 조립해 만들었다. 조립자의 이름을 딴 ‘하동환버스’가 많았다. 하동환버스는 쌍용자동차의 전신이다. 54년 일본산 엔진과 부품을 들여와 외장을 자체 제작해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로 수출까지 했다. 이 때문에 고장도 잦았다. 한번 고장 나면 2~3일씩 세워놓고 손으로 일일이 고쳐야 했다.

장 할아버지는 “버스가 중간에 서는 일이 하도 잦아서 사람들이 별로 불평도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버스기사들은 웬만한 정비기술을 다 익혔다.

타이어 펑크는 물론 엔진 고장을 해결하고 주요 부품 교체도 즉석에서 해치울 수 있었다.

버스 안내양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89년 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으로 ‘안내양 승무의무’ 조항이 삭제되면서 버스안내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는 “젊은 처자들이 승객들과 몸씨름을 하면서도 좀 잘 살아보겠다며 애쓰던 모습이 생생하다”며 “안내양 중에 기사들과 결혼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교통카드로 대체된 토큰은 발행 당시 기사들에게 ‘선물’이었다고 한다. “예전엔 기사가 직접 잔돈을 거슬러 주기도 했는데 토큰이 생기니까 살 것 같았다”는 것이다.

요즘과 전혀 다른 풍경도 기억해 냈다. 70~80년대에는 거리 시위를 하다가도 버스가 오면 일단 비켜 줬다고 한다. 그만큼 차가 귀한 시절이고, 다른 사람들의 피해를 배려하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1911년 국내 최초로 경남 진주에서 운행된 ‘포드 8인승’ 시내버스(左). 1969년 서울에서 운행된 ‘하동환자동차(쌍용자동차 전신)’의 버스(中). 현재 서울 시내를 달리는 시내버스. 환경보전을 위해 천연가스를 쓴다. [서울시 제공]

78년부터 장 할아버지는 20여 년간 ‘외도’를 했다. ‘처우가 더 좋아’ 관광버스를 몰았다가 98년 지금의 회사로 돌아왔다. 만 57세였다. 다른 기사 같으면 정년(59세) 퇴임을 준비할 나이였다.

요즘 장 할아버지는 우이동에서 흑석동 중앙대까지 운행하는 151번 노선을 하루 2회 운행한다. 다른 운전기사들과 똑같은 스케줄이다. “요즘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여유가 없는 것 같다. 화도 잘 내고 이해를 안 해준다. 가난했지만 여유가 있었던 그 시절이 더 좋을 때도 있다.” 장 할아버지는 버스와 함께 한 43년을 뒤돌아보며 각박해진 세태를 아쉬워했다.

정년이 9년이나 지났지만, 그의 운행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버스회사에서 정년을 맞은 버스기사들을 매년 재계약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종신고용을 보장하고 있다. 동아운수 임진욱 대표는 “성실히 운전하는 기사들이 재능을 썩히는 일이 없도록 정년 이후에도 재계약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기사 474명 중 15%가 넘는 70여 명이 60세 이상이다. 장 할아버지는 “매일 같이 운동을 즐기고 술·담배를 멀리하기 때문에 체력은 끄떡없다”며 “몸만 받쳐주면 계속 버스운전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 시내버스는 49년 8월 16일 ‘서울승합’ 등 17개사가 서울시로부터 사업면허를 받아 273대를 운행하면서 본격적인 버스시대를 열었다. 서울에서는 일제 강점기인 12년부터 일본인들이 자동차 운수사업을 했고 28년 경성부가 시내버스를 운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해방 이전은 ‘정통성’이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시는 시내버스 운행 60년을 맞아 16일 새벽 첫차를 이용하는 시민에게 빵과 음료수를 무료로 증정한다. 11개 노선에서 유니폼을 입은 도우미가 승·하차를 안내하는 ‘추억의 버스 안내양’ 행사도 펼친다. 

이현택 기자 ,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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