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통신 전쟁 (중) 업종의 장벽 넘어라

중앙일보

입력 2009.06.15 03:09

업데이트 2009.06.15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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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달 2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외곽의 시타델 쇼핑몰. 메모리얼데이(미 현충일) 연휴를 맞아 북적거렸다. 중앙 광장의 AT&T 매장에서는 제품 홍보가 한창이었다. 주력 제품은 인터넷TV(IPTV) 서비스인 ‘유버스’. 트레이시 무어라는 매장 직원은 “고화질(HD) 채널 20여 개를 포함해 100개 채널을 월 30달러에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회사는 IPTV·초고속인터넷·인터넷전화(VoIP)를 묶어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월 90달러에 가입자를 유치하고 있다. 이 나라 최대 통신회사인 AT&T가 올 들어 방송 서비스를 앞세우기 시작한 것은, 이 매장 하나만 봐도 확연히 느껴졌다. 미 케이블TV 업계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이미 인터넷전화 등 통신업계의 텃밭에 발을 깊숙이 들여놓고 있다.

미국 AT&T 직원들이 미 오하이오주 멘토 시 체험관 개관을 앞두고 현장에서 고객체험용 휴대전화를 작동해 보고 있다. [AT&T 제공]

◆통신·방송의 벽이 무너진다

미국에서는 2000년대 들어 방송과 통신 업계가 초고속인터넷 시장을 놓고 한판 붙었다. 요즘은 싸움이 더 커졌다. 통신을 기반으로 IPTV를 시작한 AT&T·버라이즌과 케이블TV를 교두보로 VoIP·이동통신 등에 진출하려는 컴캐스트·타임워너 등이 더욱 치열한 각축을 벌인다. 마크 시겔 AT&T 전무는 “소비자들은 이제 서비스의 뿌리가 무언지 따지지 않는다. 원하는 서비스를 값싸고 편리하게 제공할 수 있는지만 따진다”고 말했다.

다른 업종을 무차별 침범하는 업역(業域) 파괴가 가속화하는 건, 그간 초고속 네트워크 구축으로 초기 투자비용이 커진 데다 기존 아날로그 동영상 콘텐트의 디지털화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는 전화선을 기반으로 한 통신업체와 아날로그 방송을 하는 케이블TV 업체가 공존했다. 하지만 이후 광케이블이 많이 깔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지난해엔 버라이즌이 IPTV 서비스 ‘파이오스’를 선보인 데 이어 AT&T가 유버스를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패서디나의 AT&T 쇼룸에서 만난 호세 파디야 프로젝트매니저는 “IPTV 프로그램을 휴대전화와 PC로 확인하고 예약 녹화까지 할 수 있다”고 유버스를 소개했다.

유럽도 분주히 움직인다. 프랑스는 일찍이 2002년 방송법을 개정해 방송과 통신을 ‘전자 커뮤니케이션’이란 영역으로 과감하게 통합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텔레콤 등 5개 통신사업자가 300만 명 가까운 IPTV 가입자를 확보하면서 방송 시장에 발을 들여놨다. 일본은 지난해부터 국책 프로젝트로 IPTV를 추진하고 있다. 야마지 에이사쿠(山路榮作) 총무성 통신정책과 총괄보좌는 “NTT·NHK·소프트뱅크·소니 등이 참여해 IPTV 활성화에 공동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초고속인터넷 인프라는 늦은 편이지만 IPTV의 경우 올 들어 겨우 상용 서비스에 들어간 한국보다 발 빠르다. 나카야마 도시키(中山俊樹) NTT 신비즈니스추진실 차장은 “통신과 방송이 국가 산업 육성 차원에서 상호 영역을 인정하면서 공동 서비스를 추진하고, 해외 진출 때도 보조를 맞춘다”고 설명했다.

◆‘고유 업종’이란 건 없다

미 시장조사업체 인스태트는 전 세계 통신업체들이 서비스하는 디지털 방송의 가입자 수가 2012년까지 세 배로 늘어 716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회사의 미셀 에이브러햄 분석가는 “미국과 유럽에 이어 올초 IPTV 상용서비스가 본격화한 한국과, 정부규제가 완화된 브라질·인도에서 디지털 방송의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통신 매장에서는 방송서비스(IPTV)뿐만 아니라 미니 PC인 넷북 판매에도 열을 올린다. 휴대하기 쉬운 노트북은 초고속인터넷과 IPTV 가입자를 늘리는 촉진제가 되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많이 팔아봤자 음성 이동통신 시장이 포화 상태에 달한 마당에 마진이 박하다. 할리우드 간판이 멀리 보이는 로스앤젤레스 도심의 버라이즌 매장에서는 HP의 넷북을 200달러에 팔고 있었다. 셰릴 밀러라는 직원은 “월 40달러짜리 데이터요금제에 2년 약정으로 가입하면 된다”고 염가 판매 조건을 설명했다.

미국 미디어산업의 전통 강자인 케이블TV 업계의 맞불도 거세다. 7000만 가구를 넘는 가입자를 바탕으로 ‘모든 길은 케이블로 통한다(Cable takes Me there)’는 호방한 구호를 내세워 통신업계의 ‘도발’에 대응하고 있다. 미 최대 업체인 컴캐스트는 가입자들이 콘텐트를 PC에서 볼 수 있는 ‘팬캐스트’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다. 일종의 IPTV다. 타임워너케이블도 ‘TV 에브리웨어’라는 비슷한 서비스를 시작했다. 초고속인터넷을 바탕으로 VoIP 서비스까지 한다. 통신 영역이라면 초고속인터넷 사업 정도에 발을 들인 한국의 케이블TV 업계 입장에선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북미케이블홈네트워크연합(MoCA)의 찰스 세리노 의장은 “대부분의 가정에 연결된 동축 케이블은 초고속 통신에도 부족함이 없는 성능을 갖춰 케이블 업계의 승산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케이블TV 업계는 심지어 이동통신 시장 진출까지 모색 중이다. 업계 3위인 콕스커뮤니케이션은 올해부터 독자적인 3세대(3G) 이동통신망 구축에 나선다. 컴캐스트와 타임워너는 신생 와이브로 사업자인 클리어와이어에 투자했다. 와이브로망을 통해 이동통신에 진출한다는 복안이다. 클리어와이어는 이동통신 업체인 스프린트의 자회사다. 스프린트는 케이블 업계와 손잡고 차세대(4G) 이동통신 기술인 와이브로에 투자해 미국 내 이동통신 만년 3등의 설움을 씻겠다고 벼른다.

◆특별취재팀=이원호(일본·베트남·우즈베키스탄), 이나리(영국·프랑스·스페인), 김창우(미국), 김원배(요르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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