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생기고 처음 전깃불 켠 화천 무·전·촌

중앙일보

입력 2009.06.15 00:52

업데이트 2009.06.1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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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노동리 선이골. 경남 마산에서 시작된 5번 국도의 북쪽 끝이다. 화천군 읍내에서 승용차로 20여 분 달리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산길이 나왔다. 뽕나무가 즐비한 산길을 30분 걷자 김명식(64)씨의 한옥이 보였다. 대성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전기와 전화가 안 들어 온다. 촛불과 손전등으로 산다. TV를 볼 수 없다. 휴대전화 통화는 안 되고 집 옆 높은 데서 간신히 문자메시지는 받을 수 있다. 라디오와 문자메시지로 세상과 소통한다. 김씨는 11년째 선이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강원도 화천군 노동리 선이골 전경식씨가 10일 5년 만에 전기가 들어오자 거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전씨는 “밤에 맘대로 책을 볼 수 있게 됐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화천=박종근 기자]

9일 오전 10시. 태양광 발전 설비 공사가 마무리됐다. 셋째 일목(15)이가 “흐린 날에도 전기를 쓸 수 있어요”라며 집광판을 만지작거린다. 화목(14)이는 축전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두꺼비집의 스위치를 올리자 대들보 형광등에 불이 들어 왔다. “와∼아!”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진다.

“발전기를 돌리지 않아도 불을 켤 수가 있구나.” “생각보다 밝은데요. 밤에도 마음껏 책을 볼 수 있겠다.”

김명식씨 집에 설치된 2㎾급 태양광 발전 패널. 여기서 생산한 전기로 형광등 60개를 켤 수 있다.
이날 설치된 태양광 전기(2㎾)로 소형 냉장고를 24시간 가동할 수 있고 형광등 60개를 동시에 밝힐 수 있다. 김씨는 약 2㎞ 정도 떨어진 전봇대에서 전기를 끌어오려다 포기했다. 설치비(m당 4만원 정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오후 7시. 산골이라 해가 빨리 떨어졌다. 김씨의 부인 최수연(49)씨가 부엌 전기스위치를 켰다. 최씨는 “다시 도시에 나온 것 같다”며 형광등을 올려다봤다. 일목·화목이는 손전등 대신 형광등이 켜진 화장실에서 샤워를 했다. 화목이는 “화장실이 환해 물도 따뜻할 줄 알았는데 차가워서 혼났어요”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막 돌아온 여진(12·여)이는 형광등을 몇 번이고 껐다가 켰다. “어∼ 방에도 불이 들어오네. 어떻게 한 거예요?” 여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9시면 잠자리에 들던 여진이는 이날은 10시까지 수학 문제를 풀었다. 막내 원목(11·여)이가 손톱에 분홍색 매니큐어를 발랐다. 원목이는 “밤에 매니큐어 발라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학교에서 숙제를 했는데 이제는 집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처음 전기가 들어온 날 아이들 방에는 밤 11시가 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 선이골의 다른 두 가구에도 태양광 시설이 설치됐다. 초입에 홀로 사는 전경식(42)씨는 “도시 사람들은 이런 기분 모를 거다. 친척들이 올 때 언제나 건전지와 촛불을 선물했는데 이제는 필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씨네 싱크대 선반·책장·책상·방 등 곳곳에 어제까지 사용하던 초가 널려 있다. 화장실 갈 때는 손전등을 사용했었다. 전씨는 5년 전 이곳에 정착해 밭에서 마늘·땅콩·서리태를 키운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넘쳐 감당하기 힘들었다. 홀로 지낼 곳을 찾다 여기로 왔다”며 “처음 3년 동안은 사람들과 관계를 버리는 것이 좋았지만 지금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기가 들어왔으니 손님맞이가 쉬워지고 밤에 맘대로 책을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선이골에 태양광 발전 설비를 무상으로 제공한 주인공은 사단법인 ‘에너지 나눔과 평화’와 태양광 설비 전문업체 ‘커너지’다. 이들은 전기가 없는 오지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태양광 발전기를 지원하고 있다.

화천=강기헌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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