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아시아적 가치'논쟁 허와 실

중앙일보

입력 1998.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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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시아 금융위기를 일으킨 유력한 형이상학적인 '용의자' 로 아시아적 가치가 지목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70년대와 80년대 내내 아시아 경제가 높이 뜰 때는 아시아경제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것은 아시아적 가치, 특히 유교적 전통일 것이라고 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공동체의식과 높은 교육열 및 근면성실 같은 것이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의 내용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한국.태국.인도네시아가 금융위기를 맞고 그 파장이 일본까지 미치게 되자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다.

동아시아의 가부장적 (家父長的) 인 전통은 생각의 유연성과 창의성을 억누르고, 정부는 정실주의로 경제를 운용하고, 투명하지 않은 기업경영은 시장원리보다 연줄에 좌우돼 오늘의 불행을 초래한 혐의를 받고 있다. 미국의 권위있는 신문과 잡지, 그리고 동남아시아 일부 신문들은 싱가포르의 리콴유 (李光耀) 선임총리,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 MIT대의 크루그먼 교수, '역사의 종말' 저자로 유명한 조지 메이슨대학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 아시아.태평양 담당 미 국무차관보를 지낸 리처드 홀브룩 등 수많은 사람들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찬반의견을 실어 아시아의 가치는 지적 논쟁거리로는 전성기를 맞은 인상이다.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쟁을 시작한 사람은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다.

94년 3월에 포린 어페어스는 리콴유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거기서 리콴유는 "문화는 천명 (天命)" 이라고 전제하고, 서양식 민주주의와 인권은 문화가 다른 동아시아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그해 11월호 포린 어페어스에 리콴유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명분을 찾기위한 거짓 주장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김대중총재는 동양의 전통사상이 민주주의 이념을 담고 있었다는 근거로 서양 근대민주주의 이론의 기초를 세운 존 로크보다 2천년이나 앞선 맹자의 주권재민사상과 동학의 인내천 (人乃天) 사상을 들었다.

그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걸림돌은 문화적인 유산이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들의 저항이라고 공격했다. 리콴유가 지난 2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대통령에 대해 덕담으로 대꾸할 만한 질문을 받고도 논평을 사양한 것은 金대통령에 대해 경계심리나 경쟁심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시아경제가 금융위기에 휘말리자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논쟁은 유교적 전통이 시장경제의 발전에 플러스가 되는가 마이너스가 되는가의 논쟁으로 되살아났다. 여기서도 金대통령과 리콴유는 극과 극의 입장에 선다.

리콴유는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적 민주화를 유보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만약 1989년 중국의 천안문사태 때 시위학생들이 승리했다면 오늘의 중국경제는 지난날 소련경제보다 더 형편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金대통령은 취임사에서부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병행 추진돼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1994년에 아시아경제의 하강을 예언했던 크루그먼은 지금의 경제위기와 아시아적 가치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아시아적 가치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던 크루그먼이 입장을 다소 후퇴시킨 것 같다. 후쿠야마는 아시아적 가치가 경제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려면 합리주의 정신.투명성.시장원리.개인존중 같은 서양의 가치와 접목돼야 한다고 주장해 아시아적 가치의 존재 자체는 인정을 한다.

지 난 4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적 가치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앵글로색슨의 가치라는 것이 있는지 확실치 않은 것처럼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에게 통하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서양에서도 농경사회일 때는 가족간의 유대가 중요했다는 것이 토플러의 주장이다.

홀브룩도 가족간의 유대는 아시아의 가치가 아니라 인류 모두의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시아적 가치라는 수사 (修辭) 의 장막 뒤에서 연고주의적 자본주의와 수상쩍은 재무제표가 자란다고 주장한다. 아시아적 가치의 논쟁은 우리에게 해묵은 화두 (話頭) 하나를 던져준다.

박정희 (朴正熙).리콴유.수하르토의 권위주의적 통치만이 한국.싱가포르.인도네시아의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것인가. 인도와 방글라데시는 경제발전에 앞서 민주주의를 실시해 경제적으로 낙후한 것인가.

김대중대통령의 말대로 한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한국이 70년대와 80년대에 경제를 중진국 수준으로 올려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가. 아시아적 가치의 논쟁에서 두가지 걱정이 있다.

하나는 모호한 아시아적 가치를 강조해 환란 (換亂) 책임자들에게 심리적인 면죄부를 줄까 걱정이고, 다른 하나는 金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이 논쟁에 가담해 리콴유.마하티르.수하르토 같은 '아시아적 가치론자들' 을 압박해 아세안 외교에 부담을 줄까 걱정이다. 그들은 민주화투사였던 金대통령의 외교행보에 긴장하고 있다.

도덕적 우위에서 동남아를 상대로 '민주화 외교' 를 편다면 金대통령은 국제적으로는 명성을 얻겠지만 한국은 적지 않은 대가를 치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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