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총장까지 나선 외국인 에이즈 검사 논란

중앙일보

입력 2009.06.05 01:50

업데이트 2009.06.05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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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달 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보건기구(WHO) 총회 당시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을 만나 “한국은 에이즈 환자 출입국을 제한하는 11개 국가 중 하나”라며 “에이즈 환자에 대한 출입국 제한을 풀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반 총장은 주제네바 한국대사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이같이 권고했다고 한다.

한국은 외국인에게 에이즈 검사를 강제하고, 감염 사실이 드러나면 사실상 추방해 국제사회에서 에이즈 인권 후진국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중앙대 안성캠퍼스 교양학부 안드레아 반돔(30·여·사진) 교수는 다음 주 중 공익변호사 모임 ‘공감’의 장서연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출입국관리법 시행규칙에 관한 헌법소원을 제기할 예정이다. 외국인에게 회화지도(E-2) 비자 발급 때 에이즈 바이러스(HIV) 검사를 강제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다. 2006년 E-2 비자로 처음 한국에 온 반돔 교수는 2월 비자를 갱신할 때 HIV 검사 여부를 담은 건강진단서를 요구받자 이에 반발해 소송을 준비해 왔다.

반돔 교수는 “3월 말 건강진단서 제출을 거부한 채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편지를 썼더니 곧바로 비자를 받았다”며 “그러나 국내 영자 신문에 이 같은 내용이 소개되자 출입국관리소 측이 비자를 취소하겠다고 알려 왔다”고 말했다. 장서연 변호사는 “건강진단서 제출 요구는 출입국관리법상 근거가 없는 데다 내국인 강사에겐 검사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외국인 강사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수원출입국관리사무소 김광태 체류실장은 “반돔 교수가 서류를 냈을 때 당연히 에이즈·약물 검사 기록이라고 여겨 실수로 비자를 내준 것”이라며 “건강진단서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서류 보완을 요구했으나 거부해 취소하려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법무부는 2007년 말부터 외국인 강사들에게 마약 복용과 에이즈 감염 여부를 확인하는 건강진단서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다. 또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에이즈예방법)은 취업을 위해 90일 이상 장기 체류하는 연예인·운동선수 등은 에이즈 검사를 의무화하고 감염자의 입국을 제한하고 있다. 입국한 뒤 감염이 확인되면 강제 퇴거 대상이다. 이는 에이즈 환자의 거주 차별을 금지하는 유엔의 입장과는 배치된다.

에이즈는 감염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주로 전파되므로 강제 출국 조치는 에이즈 검사를 기피하게 만든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에이즈퇴치연맹 김훈수 사업국장은 “외국인 감염자를 무작정 내쫓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출입국 정책을 통해 환자를 걸러낸다고 하지만 관광비자로 체류하면서 불법 취업하는 경우는 어떻게 할 거냐”고 반문했다.

외국인 강사의 에이즈 검사와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던 경희대 법학과 벤저민 와그너 교수는 “일하러 한국에 온 외국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면 국가 이미지가 나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반 총장의 권고를 받아들일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질병관리본부 유병희 에이즈·결핵관리팀장은 “에이즈예방법상 HIV 음성 확인서 제출 요구가 입국 제한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감염자를 강제 출국시키는 출입국관리법은 고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반 총장의 권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고 출입국관리법 개정과 관련해 현재 진행되는 게 없다”고 말했다. 

안혜리·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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