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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쪼잔한 정부, 답답한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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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오늘부터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13회 인권영화제는 서울시의 갑작스러운 허가 취소로 무산될 뻔했다. 1월 23일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 장소를 사용하겠다고 신청해 2월 17일 허가가 났다. 시설 사용료 130여만원을 이미 냈다. 그런데 행사 이틀 전인 그제 느닷없이 특급우편으로 ‘청계광장 사용 허가를 취소합니다’라는 공문이 주최 측에 날아들었다. 집회·시위가 아니라 사흘간 28편의 영화를 빡빡하게 상영하는 문화행사인데도. 어제 저녁에야 서울시가 허가 취소를 번복해 행사가 예정대로 열리게 됐지만 뒷맛이 영 개운하지 않다. 쪼잔하지 않은가.

답답하던 차에 서울대·중앙대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 읽어 보았다. 서울대 것은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는 국민적 화합을 위해 민주주의의 큰 틀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긴 제목이었다. 중앙대는 ‘다시 민주주의의 죽음을 우려한다’였다. 서울대 선언문이 상대적으로 완곡한 어법을 구사했다. 중앙대 선언문은 ‘오만한 권력자들의 칼날에 베어진 억울한 죽음’ ‘현 정권과 집권당의 폭정’ ‘약육강식의 비정한 정글이자 총성 없는 무한경쟁의 전쟁터’ 등 강한 표현이 많았다.

예상대로 집회의 자유 측면 등 나도 느꼈던 현 정부의 문제점이 두 선언문에도 반영돼 있었다. 그러나 찬찬히 되풀이해 읽을수록 실망감과 답답함이 밀려왔다. 명색이 대학교수들이 작성한 선언문인데 ‘베인’으로 해야 할 것을 ‘베어진’으로 틀리게 표기한 것은 오히려 작은 문제다(그들에게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큰 문제다). 적어도 내 눈에는 두 선언문 모두 목청껏 외치기만 했지 ‘대안’은 없고 균형감각과 종합적 시각이 결여돼 있었다.

그래서 당장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어졌다. 예를 들면 서울대 선언문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대북 정책이 거둔 성과도 큰 위험에 처했다’고 했는데, 북한의 핵실험은 지난 10년의 대북 정책 탓인가, 아니면 이명박 정부 탓인가. 또 2006년의 1차 핵실험은 누구 책임인가. ‘(용산 참사를 수사한) 검찰이 수사 기록 중 핵심적인 대목의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재판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했는데, 똑같은 논리로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기록도 공개하라고 촉구할 용의는 없는가 등등의 질문이 마음속에서 꼬리를 물었다.

2009년 6월에 발표한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이 49년 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며 거리에 나선 교수들의 선언문과 똑같은 무게와 절박함을 담으라고 주문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 상황이 다르고 민주화 정도도 하늘과 땅 차이다. 그렇다면 보다 세밀한 상황 인식과 정치한 논리로 무장해야 설득력이 있다. 적어도 시국선언문이라면 일반 국민을 격동(최소한 공감)시켜야 하고, 읽는 상대방이 ‘아파야’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번 두 선언문은 정파성(政派性)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아는 사람, 우리 편끼리 돌려보고 서로 어깨를 치며 칭찬한다면 그게 ‘시국선언’일까. 앞으로도 여러 대학이 선언문을 발표한다는데, 좀 더 고민을 많이 해서 작성하면 좋겠다. 이 나라 최고 지성들의 선언이라 역사에도 남을 테니 문장도 잘 다듬어서 말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