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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여의도 정권거래소 갑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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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가 어제 의미 있는 결정을 내렸다. 표준어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규정한 표준어 규정과 공문서·교과서에 표준어를 쓰도록 한 국어기본법을 대상으로 청구한 헌법소원 심판에서 합헌 결정을 한 것이다. 헌법소원은 지역말 연구모임인 ‘탯말두레’가 “표준어만 쓰라는 것은 행복추구권·평등권·교육권을 침해하는 일”이라며 2006년에 냈다. 쉽게 말해 “경상도·전라도 사투리를 쓰면 교양 없는 사람이란 말이냐”고 항의한 셈이다.

그러나 헌재는 공문서를 방언으로 만들 경우 의사소통상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고, 지방 방언으로 각기 다른 교과서를 만들면 학생들이 표준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를 잃게 된다며 합헌이라고 했다. 국어가 옛날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주로 한문에 의지했고, 일제시대엔 일본어 교육을 강요받았다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국어 및 문화의 정체성’도 합헌 판단의 근거로 내세웠다.

맞는 말이다. 헌재 결정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위헌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는 문제가 많다. 우리 국어는 이미 표준 말·글만 널리 보급하는 단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다른 방언을 본격적으로 접할 첫 기회는 대개 수도권 대학 진학이고, 남자의 경우 ‘팔도 사나이’가 모이는 군대에서 별도로 ‘과외교습’을 받게 된다. TV 드라마나 영화도 훌륭한 교재다. ‘동막골’ ‘황산벌’은 진한 사투리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래서 지방 출신들은 서울에서 대학·직장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이중언어’ 생활을 하게 된다. 친한 동료가 고향 사람과 통화할 때 갑자기 외계어(?)를 구사하는 경험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사실 서울 사람이라 해도 워낙 지방 출신이 많아서 언어적으로는 잡탕이나 다름없다. 홍명희의 『임꺽정』에도 나오듯, 남자 형제를 ‘언니’라고 부르는 순 서울말을 구사하는 이를 나는 가물에 콩 나듯 만나보았다.

앞으로 지방 방언들을 제대로 대접하고 보존하고 다양성을 부추기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본다. 헌재 결정에서도 9명의 재판관 중 김종대·이동흡 재판관은 소수의견을 냈다. 이들은 “서울 외의 각 지방어도 누대에 걸쳐 전승된 우리의 문화유산”이며, “특정 지역어를 표준어로 하면 다른 지역 방언을 쓰는 사람들의 언어생활이 상당히 위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경우 제국주의 시절인 1941년 ‘도쿄 야마노테(상류층 주거지)에 사는 교양 층의 말’이라고 표준말을 정의하고 비표준어를 쓰는 국민을 ‘간첩’으로 몰았던 역사가 있다. 전국적인 사투리 박멸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도 이제는 특정 방언 대신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보통어’를 중시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헌재 소수의견대로 사투리도 우리의 귀중한 자산이다. 우리는 과거 TV 드라마에서 식모 등 사회적 지위가 낮은 직업은 특정 지역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등장시켰던 뼈아픈 차별의 기억을 갖고 있다. 최근 들어 지방마다 사투리 경연대회 같은 행사가 열리는 것은 반가운 조짐이다. 사투리는 우리말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소중하게 대접하고 키워나가자. 오늘 우리가 떠나보내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빼고는 이미지를 제대로 그리기 어렵지 않은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