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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인사동 진짜는 숨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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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된 서울 인사동 방회문 사장의 비단 가게에는 도둑고양이도 주인처럼 드나든다. 외진 골목에 숨어 있어도 이 집은 늘 이렇게 열려 있다.

‘당신이 본 그림은 모두 가짜.’

최근 개봉했던 영화 ‘인사동 스캔들’의 홍보문구다. 이 자극적인 문구에 인사동 사람들은 흥분했다. 지금은 흐지부지됐지만 한때 이 영화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골동품과 도자기·고서 등 한국의 전통 상품이 거래되는 상징적인 동네. 하지만 “인사동에서 가장 쉽게 살 수 있는 건 중국산 짝퉁”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전통’과 ‘현실’이 혼재된 곳이기도 하다. ‘과연 진짜 인사동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전통’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진짜 인사동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처음 들른 집. 혼자서 지나가기에도 빠듯한 골목을 몇 차례나 좌회전·우회전해가며 ‘송도직물’이라는 작은 간판을 단 허름한 한옥집을 찾아 들어갔다. 인사동을 안다 하는 사람들은 이 집이 ‘진짜 인사동 상점’ 중 하나라고 손꼽았다. ‘삐거덕~’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돌돌 말린 비단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히 쌓여 있는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비단 더미 앞엔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렸고, 한 노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노인이 말을 건넸다.

“비단 보러 왔어?”

“어르신이 인사동 표구비단으론 제일 유명하시다기에 취재하러 왔어요.”

방희문(78)사장은 "늙은이가 뭘 볼 게 있다고…"하면서도 반갑게 손을 맞아주었다. 30년째 이곳서 비단을 팔고 있다는 그는 자신을 '비단으론 인사동 문화재'라고 했다.

"이렇게 골목 깊이 계셔서 찾기 힘들었어요."

"그래도 전국서 표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집을 잘 알지."

알아야 할 사람이 알고 있으니 괜히 번화한 데로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전 당시 홀로 개성에서 피난을 나와 충남 공주에서 '양단'짜는 기술을 배웠다고 했다. 그 기술을 밑천으로 표구비단 공장을 차렸는데, 당시 거친 표구비단과 달리 고운 양단으로 만든 그의 비단은 인사동 표구사에서부터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예 이곳에 가게를 차리게
됐다는 것이다. 그의 옛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와 이야기하는 동안 고양이는 비단더미 위를 오가다 말고 싫증이 났는지 사람들 사이로 태연스레 왔다갔다 했다.

"고양이 이름이 뭐예요?"

"몰라. 도둑고양이니까."

인사동의 후미진 골목에 처박혀 있는 이 진짜 인사동 상점은 도둑고양이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여유가 여전히 넘치고 있었다.

글=한은화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아무나 드나들 수 없다
도도한 장인들의 가게

진짜 인사동 상점들은 도도하다.

고미술품을 취급하는 안백순(76) 동예헌 대표(上)와 고서점 통문관 주인 이종운(40)씨.

인사동의 중앙통인 ‘인사동길’에 있는 장인들의 가게는 늘 문이 닫혀 있다. 문을 활짝 열고 손님들을 불러들이는 옆의 기념품 가게들과는 ‘인생관’ 자체가 다른 듯 보인다. 고서점 ‘통문관’도 그런 집 중의 하나다. 이 집은 1934년에 문을 열었으니 75년이나 된 집이다. 인사동길에 있는 이 집은 문이 닫혀 있는 건 기본이고, 바깥으로 난 통유리창으로도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천장까지 쌓인 책들 때문이다. 그나마 책을 쌓아놓지 않은 입구의 창에는 각종 서화가 붙어 있다.

이 집은 늘 바깥 사람들을 궁금하게 한다. 통문관을 찾았던 날도 바깥에선 몇 사람이 모여 웅성거렸다. 창에 붙은 서화 틈새로 조금이라도 안을 들여다보려고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가게는 솔직히 문 열고 들어오기 무서운 곳이에요.”

통문관 주인 이종운(40)씨의 말이다. 꽁꽁 가리고 있는 이유가 “사람들이 마구 드나들다 책이 훼손될까 봐”란다. 만지면 바스러질 정도로 오래되고 낡은 책이 많아,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면 책이 상할 우려가 있단다. 그래서 인사동에 관광객이 많은 일요일엔 아예 장사를 안 한다.

이곳은 우리나라 고서점 중 역사가 가장 긴 집이다. 이씨는 통문관을 처음 연, 고 이겸로 선생의 손자다. 이 선생은 생전에 『월인석보』 『청구영언』 등 보물급 전적을 비롯해 수많은 고서를 발굴·수집한 걸로 명성을 날렸다. 통문관에 대한 그의 첫 기억은 무더기로 쌓인 고서 틈에서 할아버지한테서 천자문을 배웠던 것이다. 이씨는 “어릴 때부터 고서·한문과 함께해 남들보다 책을 보는 감이 빠르다”고 했다. 조선시대 한자책에 관심이 많던 할아버지에 비해 그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때까지의 인문과학 쪽 학술서에 관심이 많다. 이씨는 “일본은 그 짧은 시간 우리나라를 점령하면서 지리산 야생동물, 나무 종류까지 조사해 책으로 냈을 정도로 치밀했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자료 중 특히 귀중히 여기는 것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기관지로 발행한 항일투쟁지 ‘상해독립신문’이다. 창간호부터 170부가 있다. 일본의 한 도서관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려 했으나 이씨는 이를 고사했다. ‘우리나라 도서관에 들어가야 할 물건’이라고 생각해서다. 시대의 기록물인 책을 둘러싼 에피소드는 많다. 그는 “할아버지께서 88살이 되셨을 때 책을 사고 팔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엮어 『통문관책방비화』라는 책을 냈는데 나도 그 나이쯤 되면 통문관 주인으로 겪었던 이야기를 엮어 책을 내고 싶다”며 웃었다.

잊힌 역사를 모으는 인사동 장인들에겐 비켜갈 수 없는 논쟁이 ‘진품 논의’다. 인사동의 한 상인은 “골동품 하면 인사동을 제일 먼저 떠올리면서도 인사동에 과연 ‘진품’이 있겠느냐고 의심부터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인사동 토박이 장인들은 누구보다 더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고미술품을 취급하는 안백순(76) 동예헌 대표도 그렇다. 그는 인사동의 고미술품 시장에서 ‘경매’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다.

인사동 골목길은 끝이 없다. 인사동의 중앙통인 ‘인사동길’에서 11개의 골목길이 갈라져 나와 서로 어지럽게 얽힌다. 그 갈래길 어디쯤 인사동 터줏대감들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권혁재 기자]

“고미술품을 음성적으로 거래하지 말고 투명하게 거래하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항의도 많이 받고 욕도 엄청나게 먹었지.”

그는 경매를 도입한 뒤의 일화를 이렇게 말했다. 그 이유는 고미술의 가격을 노출하는 걸 업계에서 꺼렸기 때문이었다는 것. 하지만 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하게 되면 인사동도 위작 논란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안 대표는 ‘경매에서 고미술품이 가짜로 판명될 경우 경매가에 10%를 수수료로 더 준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도 역시 ‘위작 추방 운동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관리국 공무원 출신인 그는 10여 년의 공무원 생활 동안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문화재를 등록·단속하는 일을 맡았다. 이후 공무원 생활을 접고 고미술품 업계에 뛰어들면서 그는 경매와 같은 현대적 마케팅을 접목해왔다. 그는 고미술 업계도 창의적인 발상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 예로 그는 1970년대 말 서울 미도파 백화점에서 목가구 전시를 처음 했다. 당시엔 국내에서 목가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새로운 분야로 보고, 전국을 돌며 최상품의 목가구를 수집했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당시, 영부인 접견실을 한식 목기로 꾸미면서 한식 목가구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결국 고미술도 새로운 영역과 분야를 만들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여든을 바라보는 안 대표에게는 꿈이 있다. 소장하고 있는 2000여 점의 서예품으로 서예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안 대표는 “역사적 기록이 부족한 나라에서 유물이라도 제대로 관리해 후손에게 남겨주고 자긍심을 주는 게 우리 인사동 장인들의 일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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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엔 100년 된 필방, 55년 된 표구사…

인사동은 수많은 갈림길로 이뤄졌다. 안국동 네거리부터 종로2가까지 쭉 뻗어 내려오는 ‘인사동길’이 인사동의 몸통이다. 이를 중심으로 11개의 골목길이 옆으로 뻗어 있고, 또 여기서 갈라져 나온 길들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요즘 사람들은 ‘인사동이 변했다’고 한다. 한국 전통문화의 거리라 불리는 인사동에 중국산 기념품이 전면을 차지한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모르는 소리다. 인사동 터줏대감 장인들은 여전히 인사동에 있다. 임대료가 비싸져 1층에서 2층으로, 중심 거리에서 골목 안쪽으로, 동네 바깥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표구사 정일표구사 정일표구사 대표 김권영(71·사진)씨는 올해로 55년째 표구일을 한다. 54년 시골에서 인사동으로 상경해 지금까지 표구일을 하고 있으니 ‘인사동 토박이’나 다름없다. 표구는 서화를 액자·족자 등에 보관하는 일을 말한다. 훼손된 서화 표구를 복원하는 일도 표구사의 몫이다. 김 대표는 3월 강원도 낙산사의 탱화 복원을 맡았다. 족자로 된 큰 탱화 두 점은 끝이 다 너덜너덜 떨어져 있었다. 안동 한지공장에서 특수종이를 주문해 떨어진 부분의 종이 올을 일일이 맞춰가며 감쪽같이 복원해 액자로 새로 만들었다. 김 대표는 “표구일은 아무리 오래 했다 하더라도 작업할 때 천천히, 세밀하게 해야 완성도가 높다”고 했다. 그는 “요즘에는 표구일을 제대로 배워보려는 사람이 없어 앞으로 문화재가 손실되면 어쩌나 걱정”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필방 구하산방 ‘첩첩산중에 있는 신선들의 집’. 인사동의 가장 오래된 필방인 구하산방(九霞山房)의 뜻이다. 1910년에 문을 열어 100년째, 3대로 이어 온 필방에는 종이·먹·붓·물감 등 서화 재료가 가득하다. 작은 가게에 갖추고 있는 가짓수만 2000가지가 넘는다. 물건이 많다 보니, 가게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뭐 찾냐”고 묻는 게 홍수희(59) 대표의 일이다. 벽면 가득 놓인 붓 앞에서 뭘 골라야 할지 몰라 서성거리는 사람에게 “이 붓이 좋다”며 용도별로 골라주기도 한다. 오래된 필방에는 신선 대신, 그림을 공부하는 학생에서부터 전국의 화가들이 몰린다. 홍 대표는 “우리 집 거쳐서 화가된 사람들 많지. 우리 가게 모르면 작가가 아니지”라며 웃었다.

고미술 석경고미술연구소 석경고미술연구소는 인사동 외곽에 있는 건국빌딩 내에 있다. 연구소 안 곳곳에는 ‘달 항아리’ 그림이 놓여 있다. 황규완(65·사진) 대표가 직접 그린 그림이다. 황 대표는 “넉넉한 품새의 달 항아리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고 했다. 황 대표는 고등학생 시절 우표·화폐를 모으다 고미술 쪽으로 뛰어들었다. 대학에서 관광경영학을 전공하면서 도자기·목가구·민화 등 고미술품을 모으려고 전국 방방곳곳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는 “집안에 고미술품이 꽉 차니까 어머니가 ‘너는 세상에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팔자가 깨진 그릇만 그렇게 좋아하느냐’며 구박하셨을 정도”라고 웃었다. 도자기 공부를 하려고 전국의 가마터를 돌아다니고, 밤새워 책을 보며 공부했다. 고미술품을 하면서 황 대표는 78년부터 ‘박물관을 많이 짓자’는 박물관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발족한 민중박물관 협회는 현 박물관 협회의 전신이다.

고서점 승문각 인사동길에 있는 고서점 통문관에서 조금 내려오다 보면 승문각이 나온다. 승문각은 62년에 문을 열어 현재 2대째 내려오고 있다. 서점은 밖에 각종 기념품을 내놓고 파는 가게 옆인 데다 가게 폭도 좁아,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가게 안은 세월의 더께가 잔뜩 앉은 오래된 책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각종 고서부터 희귀본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승문각은 바쁜 직장인들을 위해 인터넷을 통해서 서점의 소장본을 팔고 있다.

고가구 화안가구 화안가구는 전통 가구를 재현해 만든 가구로 유명하다. 특히 사대부들의 사랑방 가구를 수작업으로 그대로 재현한다. 최인호·법정 스님 등 글을 쓰는 사람들은 화안가구의 앉은뱅이책상이나 사방탁자를 좋아한다. 청와대를 비롯해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 파리의 한국문화원 등 각종 한국식 인테리어에 화안가구가 동원됐다.

조선시대 화가 양성하던 도화서 있던 곳
인사동의 역사

서울 인사동의 역사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조계사 바로 옆 터에는 조선시대 화가를 양성하고 선발하던 도화서가 있었다. 매년 화가를 뽑는 시험이 실시된 도화서에는 전국의 화원 지망생이 몰려들었다. 이들을 위해 인사동엔 자연스럽게 지필묵을 파는 가게들이 생겼다. 인사동에 처음 고미술품 시장이 형성된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이때부터 인사동은 ‘한국 전통 문화재 유출의 현장’이 된다. 몰락한 조선 양반 댁에서 집에 있던 고미술품을 일본인에게 내다 팔기 시작했다. 보리쌀 몇 되와 맞바꾸기 위해 전국의 고미술품이 인사동으로 모였다. 리어카에 고서화·민화를 한가득 싣고 와 좌판을 벌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없던 터라 상태가 깨끗하면 값을 좀 더 받고, 지저분하면 덜 받는 식으로 물건을 팔았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인 대신 미군과 유럽인들로 주 고객이 바뀌었다. 인사동은 뒷골목에 볼 것이 많은 ‘매니스 앨리(Many’s Alley)’로 외국인에게 불리기 시작했다.

70~80년대부터 인사동에 화랑·표구사 등의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 미대 졸업생이 나오면서 전시회를 하기 위한 화랑이 들어섰다. 이들의 그림을 표구하려는 표구사와 이들에게 붓을 파는 각종 필방들이 속속 생겼다. 당시만 해도 인사동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상가는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일제히 문을 닫았다. 인사동의 한 상인은 “토요일 오후에는 수퍼도 문을 닫아 인사동에서 담배 한 갑 사는 것도 일이었다”고 했다. 그래도 화·수요일 저녁이면 사람들로 붐볐다. 화랑들이 매주 수요일 새로운 전시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전시의 마지막 밤인 화요일과, 전시의 시작 날인 수요일 저녁 인사동 인근 주점에는 뒤풀이를 하려는 예술가들로 북적인다.

97년에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면서 일반인들이 주말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2000년 인사동 길을 정비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했지만, 인사동 길은 올해 3월 재정비 사업에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길과 곳곳에 놓인 돌이 불편하다는 시민들의 불만이 꾸준히 제기된 결과다.

문인 따로 화가 따로, 노는 집이 다르다
예술가의 아지트

‘여덟 사람이 앉아 있다 / 두 사람은 시인이고 / 두 사람은 화가다 / 한 사람은 조각가고 / 한 사람은 무용가 / 저쪽 구석에 앉은 두 사람은 작가라는데 / 무슨 작가인지 알 바가 아니다 / 시인은 기타를 치고 / 화가는 손뼉을 치고’.

이생진 시인의 시집 『인사동』에 수록된 ‘시인과 화가1’이라는 시다. 이 시인의 시처럼 인사동 곳곳에는 시인·화가 등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숨어 있다. 가벼운 주머니로 가서 밤새 입심을 자랑하며 놀다 올 수 있는 곳. 언제 찾아가도 반가운 벗이 먼저 앉아 술잔과 그리움을 비비고 있는 곳. 이들의 아지트 중에 ‘외상값을 견디지 못해’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는 술집도 있다.

주점 ‘평화만들기’(사진)는 문인들이 어울려 밤 늦도록 술을 마시던 대표적인 곳이다. 85년 소설가 유정룡씨가 문을 연 이래 천상병·신경림·고은·이호철·이외수·중광 스님과 같은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시인 김지하가 직접 휘갈겼다는 한쪽 벽면의 시 ‘그리움’(이용악 시인)은 이 주점의 상징이다. 단골손님이던 이해림씨가 92년 이 가게를 인수한 후 386 정치인들이 시국을 논하는 등 다양한 소설모임과 동호회가 열리는 유명 장소가 됐다. 평화만들기에는 메뉴판이 없다. 단골들은 냉장고에서 술과 안주를 직접 꺼내 먹고, 주인은 인원 수와 시간을 감안해 대강 값을 부른다. 가게에 오는 손님의 상태에 따라 맞춤형 안주를 내오기도 한다. 지난 2월 이해림 사장이 가게를 그만둔 후 가게가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평화만들기를 찾는 문인은 여전히 많다.

33년째 인사동 골목을 지키고 있는 밥집 ‘부산식당’은 화가들의 아지트다. 외관은 허름한데 안에는 전시회 포스터가 색색으로 빽빽이 붙어 있다. 예전에는 돈 없고 가난한 화가들이 밥값 대신 두고 간 그림들로 가득하던 때도 있었다. 주인장 특유의 손맛과 마음 씀씀이가 어우러진 이곳은 인사동의 살아 있는 추억이다. 사장 팽흥순(69·여)씨는 “그림 그리는 분들이 대개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우리는 재료 값만 받으니까 많이 찾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집에서 쓰는 간장·고추장 등 장류는 모두 사장이 직접 담가 음식마다 깊은 맛이 있다.

역시 생긴 지 30년이 넘은 ‘이모집’은 은희경·전경린·신경숙 등 여류 소설가들이 자주 찾았던 밥집이다. 한정식집 ‘선천’도 예술가는 물론 정·관계 인사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다. 담쟁이 넝쿨이 눈에 띄는 스파게티 가게 ‘볼가’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 젊은 문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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