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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家를 찾아서] 천안 병천면 용두리 조병옥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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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란 통상 한 집안에서 정치인·관료·학자·기업인 등이 다수 배출된 경우을 말한다. 천안·아산에서 명문가로 일컬을 만한 집안을 소개해 본다.



 

조병옥 박사 생가에서 근처에 사는 종친 조성근씨가 조씨 일가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조영회 기자]

‘피고 조인원, 유관순, 유중무를 징역 3년에 처하고, 피고 김용이, 조병호를 징역 2년6월에 처하며, 피고 김상훈, 백정운을 징역 1년6월에 처하며, 피고 조만형, 박제석을 징역 8월에 처한다.’ 1919년 6월 30일 경성 복심법원(2심) 형사부 재판장의 판결문 내용이다. 같은 해 4월 1일 천안 병천에서 있었던 아우내 시위의 주동자들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피고인 중 가장 먼저 호명된 조인원(趙仁元,1865~1931)은 당시 55세로 유석 조병옥(趙炳玉,1894~1960)박사와 조병호(1900~1973)의 부친이다. 조병옥이 태어난 곳은 천안 병천면 용두3리. 유관순(1902~1920)열사 생가인 용두1리와 마주보이는 곳으로 1km 정도 떨어졌다. 한양 조씨가 이곳에 세거한 시점은 정확하지 않다. 현재 생가는 초가집으로 복원돼 있고 자동차 대여섯대가 주차할 만한 마당과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이 마을에 사는 종친 조성근(80)씨는 “본래 생가 터는 이곳에서 30m 떨어진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 집”이라며 “넓은 터를 확보할 수 없어 이 곳에 생가를 복원했다”고 증언했다. 조씨는 “조병옥 박사가 나의 재종조, 자제 분인 조윤형(趙尹衡,1932~96)전 의원과 조순형(趙舜衡,1935~ ) 국회의원이 7촌 재당숙”이라고 말했다.

◆조인원= 유관순 열사의 작은 아버지 유중무과 절친한 사이로 함께 용두리 감리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조병옥은 『나의 회고록』(1959년)에서 “미 감리교 선교사 케블 목사가 우리 동네와서 전도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 가친은 신자가 되는 동시에 사랑채를 강습 장소로 개방하고…용두리 기독교의 창설자가 되고 속장이라는 교직까지 얻게 되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00년대 초까지 충북 청원군 강내면에 살다 병천으로 이사왔다. 서울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 열사가 서울 3·1 시위 이후 고향에 내려와 동네 어른들께 서울 소식을 전하고 봉기를 권했을 때 적극 참여한 인물이다. 조병옥의 동생인 조병호도 부친과 함께 적극 가담했다.

일본인 판사가 작성한 편결문엔 “조인원은 상의(上衣)를 벗어 (헌병)주재소장 및 헌병들의 총을 나꿔채며 그 아들인 조병호는 헌병 상등병의 뺨을 때리고 협박했다”고 적혀있다. 또 “자기(조인원)는 유중무(유중권의 동생)·유중권(유관순 부친) 및 자기 아들 조병호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자기가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고 인정했다”는 구절도 보인다. 유관순·유중무와 함께 아우내 시위 관련 최고형을 받은 것으로 보건대 일제 법정에서 주동급 인물로 평가한 듯하다.

◆조병옥= 1960년 야당인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해 이승만 전 대통령과의 결전을 1개월 앞두고 미국의 월터리드육군의료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그 후 3.15 부정선거가 행해지고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로 이어져 20여 년 군사정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

유석은 3.1운동 당시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 중이었다. 경제학 학사를 따고 곧바로 같은 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후 1925년 철학박사학위를 취득케 된다. 조병옥은 어려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삼경을 두루 익힌 후 기독교 계통의 공주 영명중학을 거쳐 서울로 간다.

당시 미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귀국해 YMCA 학생담당 총무를 맡고 있었다. 조병옥은 이승만의 영향을 받고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배재전문학교에서 영어를 익힌 후 1914년 미국으로 떠난다. 펜실베이니아주의 와이오밍고교를 거쳐 컬럼비아대 경제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귀국 후 연희전문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다가 신간회를 창립, 발족하는 데 적극 참여한다.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 사건 때 우리 학생에 대한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고 한·일 민족간의 차별로 인한 인도주의적 인권옹호를 주장, 민중대회를 준비하다 3년 옥살이를 한다. 1930년대 중반 천안에서 금광 사업에 관여했으며 당시 성거초등학교 설립 발기인에 되기도 했다.(향토사학자 임명순씨 제보)

1937년 수양동지회사건으로 2년간 투옥된 후 천안에 내려와 있던 중 해방을 맞이 한 것으로 보인다. 송진우·장덕수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미 군정청의 경무부장을 지낸 후 1948년 이승만 정부 수립 후 대통령특사·유엔 한국대표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 내무장관으로 대구 사수의 진두 지휘했다. 그러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의 의견충돌로 사직,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선다.

◆조윤형·순형= 형제 모두 서울서 태어났고 서울고를 졸업했다. 형 윤형은 연세대 정치외교학 중퇴하고 미 조지타운대학교 외교관학교를 수료했다. 부친이 별세한 28세(60년)때 민의원으로 정치 입문한다. 6,7,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5.18 신군부 집권 이후 84년까지 정치활동 규제를 받았다. 88년(56세) 정치를 재개, 13,14대 의원을 지냈고 90년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신민당 부총재(79년), 평민당 부총재(88년), 통일국민당 최고위원(92년) 등 야당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64세 별세. 세살 터울인 동생 조순형 국회의원은 형 윤형과 같은 조지타운대학에서 수학했다. 75년 조윤형 부총재 보좌역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놨다. 81년 무소속으로 서울 성북구에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84년 신한민주당 창당발기인,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민주당 부총재(91년), 국민회의 정책위원장(95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2002년)를 지내고 자유선진당 입당 지난해 5월 비례대표로 18대 국회의원이 됐다.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조한필 기자

조병옥 박사가 세운 부모 묘비 “조선은 해방 됐습니다”

 

생가 뒷편 야산(용두산) 기슭에 조인원 부부의 합장 묘가 있다. 아들 조병옥은 1948년의 한식날 새로 묘비(사진)를 세웠다. 그 때 직접 지은 묘비명이 눈길을 끈다. “(부친은) 교육에 특별히 유의하셔서 온갖 것을 애끼지 아니하셨습니다 … 아버지께서는 일생을 통해 의(義)에 굳세시사 불의를 미워하심과 작은 절개에 굽히어 큰 절개를 더럽히지 아니하시는 그 장부의 기개는 자식의 처세에 크나큰 감화력이 되었다”고 적었다. 또 “아들(조병옥)은 소년 때부터 집을 떠나서 다른 지방에 또는 타국에 가서 그 20년 동안 학문을 닦기와 그리고 왜국의 압박 때문에 일어난 한 몸의 풍파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까히 모시며 봉양함에 효성을 다하지 못하였고, 아버지께서는 저의 옥살이 하는 동안 한을 품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 그러나 두 분의 영령은 안심하십시요. 우리 조선은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독립의 완성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도 건국을 위하여 마땅히 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묘비 전면에는 깊이 파인 총탄 자국이 서너개 있다. 조성근씨는 “6·25때 인민군이 반공주의자였던 조병옥 박사를 미워해 총을 내갈겼다”고 증언했다. 조씨는 “독립유공자인 조인원씨의 묘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 한 후 묘비는 생가 앞 마당으로 옮겨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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