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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마지막 비공개 연설 ‘대통령 5년의 소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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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하루하루를 폭풍처럼 살았다. 정책이든 이념이든 늘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런 그가 스스로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정리했을까. 그 기록이 남아 있다. 퇴임을 두 달 앞둔 2007년 12월 26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송년 만찬 모임에서다. 노 전 대통령은 만찬이 말미에 이르렀을 때 긴 소회를 털어놓았다. 대선이 끝난 직후라 정치 현안과 관련한 대통령의 발언은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당시엔 소개되지 않았던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철학, 대통령관, 인생관에 대한 육성을 풀어 놓는다.

“칭송받는 대통령 물 건너가”

성공한 대통령 상에 대한
화두도 풀기 전인 2004년
만나는 사람들 말 바꾸더라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대강 이야기하면 길기는 긴데, 한두 토막 굳이 말한다면….

내가 대통령이 됐을 때 지인들이 성공한 대통령이 돼라고 했다. 그냥도 아닌 꼭 돼라고 했다. 그래서 왜 그때 사람들은 하필 성공한 대통령이 돼라고 그렇게 말했을까. 그때까지 귀가 편한 사람, 즉 칭송받는 대통령이 없었던 모양이다. 꼭 기대했던 대통령도 말년에 지탄의 대상처럼 됐다. 지지하고 사랑했든 아니든 그런 현실이 무척 아쉬워 내게 주문했던 것이 아닐까. 성공하고 칭송받는 대통령이 보고 싶다는 소망 같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1987년 때쯤인가 소망의 상징이던 시절, 그때 (국민이) 걸었던 기대는 뭘까. 그때 87년 양 김 중 한 명이 승리하면 뭐라 말했을까. 아마도 민주주의를 이뤄라? 지금 기준으론 법치주의를 만들어라, 인권이나 개혁 대통령이 돼라 했을 것이다. 이명박 당선자가 취임할 때쯤 개인적으로 무슨 인사를 받을까.

성공한 대통령. 지금까지 무엇이 성공한 대통령인가 계속 생각해 본다. 생각해 볼 가치도 있다. 아마도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그때의 인사가 대통령에게 바라는 상을 반영한 것이라 본다. 다음에라도 정리해 보고 싶다. 왜 성공한 대통령이냐 하는 것보다는 성공한 대통령의 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이런 화두를 풀기도 전에 만나는 사람들이 말을 바꾸더라. 그 사람들은 ‘이제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역사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할 것이다’고 말을 바꿨다. 그것이 2004년이 지나기도 전이었다. (나는 성공한 대통령에 대한 고민을 끝내기도 전인데 말을 바꾸니) 이제 칭송받는 대통령은 물 건너간 것이 됐다. 역사적 평가를 받는 대통령으로 넘겨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른 것 아닌가. 정도전 선생이 있다. 저는 수백 년 내 최고의 업적자로 본다. 정조 때에 와서야 제대로 복권됐다. 고려 말 개혁 세력들, 충신들이 복권하니까 왕권은 가고 사대부 역사가 됐다. 정조를 사상 탄압자로 그린 글을 봤다. 그 글은 근엄하지도 않았고, 천박한 마음 표현을 생생히 해서 사대부 표현으로 문제돼 나중에 반성문을 받고 했다더라.

역사 평가가 다를 수 있다. 지금 어느 쪽도 확신이 없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자부심 떳떳한 대통령이 되기로 했다. 내 기준으로는 그것이 가장 성공한 대통령이다. 독설이나 궤변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그것이 답이라고 사회에서 통용되는 당위적인 기준에서 내 기준을 설정하려 한다. 이것이 내가 도리 없이 스스로 설정한 성공한 대통령이다.

국민이 오만하다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제왕의 위치에 날 빗댈 것이냐, 충직한 신하의 관점에서 날 빗댈 것이냐. 나는 스스로 충직한 신하 위치에 나를 놓고 그렇게 대통령 노릇을 했다. 그것이 옳다고 봤기에…. 실제 위치도 그러니까….


“지도자가 국민 비위만 맞출 수 없어”

굴하지 않고 굽히지 않으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홀로 목숨 놓는
지사의 삶이 고귀하다고 봐

대통령을 마치면서 대통령으로선 할 만큼 했다. 열심히 했다. 직무 관련 시비곡직을 따지면 대한민국 누구도 한 시간이면 관전자 평가에서 총평 논리로 모든 것 증명이 가능하다. 수치로 내보일 수도 있다. (대선을 끝낸 지금) 국민을 섬기지 않았다고, 섬기는 대통령을 하겠다고 한다. 지금은 이게 화두죠.

국민이 섬김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충직한 신하로서 국민을 위해 이 시기에 필요하다고 보고,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고 본다. 지도자가 (국민) 비위만 맞출 수는 없다고 스스로 믿는다.

나는 옛날부터 ‘지사(志士)’를 존경해 왔다. 어떤 경우도 굴하지 않고 굽히지 않으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홀로 목숨을 놓는 지사의 삶이 고귀하다고 봤다. 정치는 그리해서도 그리할 수도 없다. 정치는 지사가 못 한다. 그러나 지사 없는 정치인만 있어도 무슨 희망으로 사는가. 지사도 더러는 있어야 한다. 정치인은 지사적 기개가 있어야 한다. 지나친 이상주의는 성공하지 못한다. 정치는 현실에 두 발을 두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상이 없는 정치가 지배하는 사회가 희망이 있는가. 정치는 현실이지만 지사가 있어야 하고, 이상이 있는 정치가 돼야 한다.

이 시기 20년 정치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 다하고, 5년짜리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 다했다. 지금 다한 일, 덜한 일이 있느냐. 개의치 않는다. 자존심 때문이다.

심한 풍랑이 있었지만 경제 안전 운항했다. 속도 4.5노트로…. 7노트는 불가능한 얘기다. 김대중 대통령은 난파선을 끌고 갔고, 나는 풍랑의 바다에서 끌고 왔다. 대통령으로서 지금 차기 대통령에게 넘겨줄 사회적 갈등의 토대가 뭐냐. 20년짜리, 15~18년짜리 과제 다 정리했다. 4대 보험 통합도 했다. 4대 보험 통합은 이제 국회에서 처리만 하면 된다. 머리띠 저항 어려운데, 새로운 정부 새로운 노선에선 새로운 갈등 날지 모르지만….

해결하지 못한 것은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 개혁 안 한 것이다. 국가 경영에선 내가 남긴 미결 숫자가 뭐냐. 그 점 자신하고 장담한다. 이 정부 때문에, 이 정부에서 마무리하지 못해 다음 정부에서 고생할 것이 도대체 뭐가 있느냐. 물론 저출산 문제 등이 있지만…. 수십 년 해묵은 과제는 있다.


“전국당 무너졌다”

정치는 실패 과정 중 행운 잡는 것
이제 통합 정치인은 나올 수 없어
말할 수 없는 좌절감 갖고 떠나

오늘 정치인으로서 최대 뉴스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열린우리당이 깨진 것이라고 했다.

우리 정치는 지역 구도를 뛰어넘어 정책 대결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고 합리적이다. 이를 막는 것은 지역 구도다. 지역 구도는 정책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극복해야 할 과제다. 그런데 전략적으로 이 구도로 가는 한 영원히 승리는 없을 것이다. 호남과 충청이 백번 뭉쳐도 이변이 없으면 (영남을) 이기지 못한다.

김대중 정부도 지역 구도 때문에 승리했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이인제씨가 500만 표 깨지 않았으면 절대로 못 이겼다. 그런데 지역으로 이긴 줄 미련이나 갖고…. (그나마 나는 영남 정치인이라) 35%의 표를 지역구에서도 가졌다. 긴 시간 동안 호남당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을 해체해 버렸다. 지역당에서 전국당으로 나의 도덕적 가치와 전 정치 생활 그리고 모든 자산을 다 바친 것이, 열린우리당에서 돌아가며 잡을 수 있는 전략인데 무너졌다.

1차로 내 책임이다. 지지도가 낮아 보궐선거 깨지면서 무너졌다. 뼈아프다. 보궐에서 못 이겨 시작됐다. 열린당 난파가. 그래도 선장과 선원이 합심해 키를 잡고 노를 저으면 깨질 당이 아닌데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젠 정치적으로 회복할 수도, 노력할 방법도 없다. 대통령 그만두면 정치적 후원이라도 하려 했는데 뭐가 있어 후원하나.

그래도 (선거에) 떨어지고 해도 저는 청문회에서 얻은 이름도 있고 해서, 떨어지고 해도 지지율이 올라갈 밑천은 있었다. 이제 통합 정치인은 나올 수 없게 됐다. 국민을 감동시키는 정치인이 나올 수 없다. 정치는 실패 가능성 큰 과정 중에 행운을 잡는 과정이다. 이루 말 못할 좌절감을 가지고 떠난다. 참여정부 때문에 졌다고 하는데…. 그럼 (당신네들은) 무슨 노력을 했느냐고 묻고 싶다. 5년 전에 망할 것을, 그래도 5년 연장해 줬으면 본전 아닌가 말하고 싶다. 우리 정치의 미래가 암담하다.



“5년 부끄럽기 짝이 없다”

시장은 인간이 빈곤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통로다. 패자가 예속되지 않는, 비천한 지배 없도록 하는 것이 정치다. 법인세 2% 낮추지 않고 그 돈으로 교육 투자 했으면…. 국회서 도저히 안 돼 법인세를 낮췄다. 예산 구조조정 했지만 교육에서의 소외나 낙오를 국가가 충분한 구제장치를 마련했나. 아니다.

5년 부끄럽기 짝이 없다. 경제 성장 부분에 대해선 당당하지만 균등, 복지, 미래잠재력에 대한 투자 부문은 부끄럽다. 복지비 20% 늘린다 어쩐다 했다. 그러면서 부끄러웠다. 지표를 말 안 했지만 그런 논리로 당당하게 비판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나. 2030 프로젝트를 하려면 (솔직히) 조세부담률 2∼3% 늘려야 한다. 지금의 조세부담률이 21%인데 24%는 돼야 한다. 그런데 세금 더 내라 말 못 하고 우물우물 물러나고 말았다.내가 느낀 가장 큰 딜레마는 지지율이 올라야 일할 수 있는데, 일하면 지지율이 깨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점이다. 국가를 합리적이고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데 책임 있게 하고, 밀린 과제 정리하고 기본 틀 만드는 데는 최선을 다했다. 좌파정부로서 정작 해야 할 일은 하나도 못 하고, 성실한 정부를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했다.

“이제 권력과 싸우는 건 내 몫 아니다”

어릴 때 가난하고 초라한 삶 탈출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고시 합격 후 나쁜 짓 하지 않는 소극적인 정의가 할 도리라 봤다. 그런데 변호사 하면서 나쁜 짓 안 한다는 소극적 정의로 개인적 탈출을 하는 것이 결코 탈출이 아닌 것을 알았다. 개인 탈출이 문제 해결이 아니고 비겁한 도피로 봤다. 그때 권력과 싸우는 것을 정의로 봤다. 정치를 하며 야당 중진 되며 다른 사고와 행동을 배우고, 여당 되며 또 배우고, 이렇게 변신하면서 대통령이 되고 나니 그 사람들, 내게 열광적 박수를 보내던 노동자들, 자다가도 일어나 몸으로 부딪침을 감수하던 노동자들과 멀리 (떨어져) 서 있는 자신을 봤다. 노동자를 구속하면서 대통령 직을 수행했다. 보기에 변절 같겠죠. 황당했겠죠. 그 노동자들 스스로 멀어지고 떨어지는 것을 봤다. 이제 시민이다. 정부 권력과 싸우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그 자리 어디든 영원한 화두는 민주주의다. 미완결 민주주의이고 발전할 여지가 있는 민주주의라면 그런 가치를 지향하는 각성자와 동행할 것이다.

“위엄 없는 대통령 됐다”

내 위치를 신하에 놔서 패착이 더러 있는 것 같다. 제왕의 위엄이란 게 있다. 어떻든 고상한 언어랄까, 제왕의 위엄에 어울리는 언어가 있는데 그걸 갖추려 노력은 했는데…. (나는) 지도자의 위엄과 카리스마, 신비를 갖추지 않은 것 같다. 사리로 설득하려 했다. 위엄으로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의도한 것과 의도하지 않은 것이 있다. 의도한 것은 내 위치를 그곳에 둔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것은 제왕적 위엄을 갖추지 못했고, 품위를 갖춘 대화를 한 적이 없다. 변호사 때도 그랬다.

내가 금기로 생각하는 것이 남을 지배하는 것이다. 지배에 필요한 수단을 일부러 배격했다. ‘저’라는 말을 했지 ‘나’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대통령이 돼 군 장병 앞에서도 군 최고통수권자로서, (주변에서)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도 ‘저’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저는 위엄을 못 갖췄고, 카리스마를 싫어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두 가지 총화가 위엄이 없는 대통령이 됐다.


“기자들과 공유 지대는 있었다”

나도 기자들도 악의 없었는데
지난 5년은 불편했던 시기
내 위치 바뀌니 다시 만나야

지난 한 해 수고 많으셨다. 고생 많으셨다. 아니 지난 5년 내내 고생 많았다. 오늘 이 자리를 준비하면서 비서들이 두 가지를 강조하더라. 오늘은 손님을 주인으로 삼고, 주인공 행세는 절대 하지 말라고. 그리고 두 번째는 제발 기삿거리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기자들이 안 쓰면 되는 건데(웃음). 내가 어느 것이 기삿거리인지 알 수가 있나.

나는 입이 하나라 가릴 수 있는데, 여러분은 손가락이 하나가 아니어서 쉽게 가릴 수 있겠나. 그러니 내가 가리겠다.

오늘 기자분들이 마련한 사진전을 보면서, 그리고 방금 전에 (참여정부) 10대 뉴스 선정 영상물을 보면서 마음이 ‘짠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마음의 감동이 있었다. 그동안 여러분 불편했죠? 나도 악의는 없는데, 여러분도 악의는 없었는데, 이 시기는 불편한 시기였다. 말로는 건전한 긴장관계 하자고 했는데 우리가 완성하지 못했다. 직접 대면하면 이렇게 관계가 해소되는데 다른 관계에서 서로 한 발 무르는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앞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있을 것으로 본다.

여러분께 좀 더 합리적으로 미래를 위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희망을 갖는다. 적대적이지만 많은 부분 공감하는 그런 영역들이 있더라고 실제로 보고받았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없다가 오늘 준비된 영상을 보니까 공감이 온다. 공유 지대가 있었구나…. 지난 일 잊고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새로운 만남 무엇일까. 왜 만나나. 직접이거나 간접도 되지만 다시 만나야 한다고 본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어떤 주제든 대화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 위치가 바뀌지 않나.

민주주의 발전에서 기여 아닌가. 공공에 한번 발을 들이면 아무리 과거를 단절시키려고 하여도 단절시킬 수 없다. 존재가치가 이미 공공 자리의 한 자락에 있기 때문이다. 함께 공유하고 일해야 하지 않겠나. 설산(雪山)은 말이 없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오늘 기사 안 되는 말만 하려니까 어렵네. 자유롭게 볼 수 있길 바란다. 그동안 감사했다. 

정리=박승희 기자 ,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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