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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피 뿐 아니라, 고뇌도 나누고 싶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4호 04면

3 드라큘라의 대명사 벨라 루고시가 연기한 ‘드라큘라’(1931)2 브람 스토커 원작에 기초한 최초의 뱀파이어 영화 ‘노스페라투’(1922) 4 섹슈얼한 이미지를 강조한 크리스토퍼 리의 ‘드라큘라의 공포’(1958) 5 뱀파이어의 실존적 고민을 담아냈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6 청춘 영화의 주인공으로 뱀파이어를 등장시킨 ‘트와일라잇’(2008)7 12세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우정을 그린 스웨덴 영화 ‘렛미인’(2008)8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 9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블러드:더 라스트 뱀파이어’(2000) 10 전지현 주연의 ‘블러드:더 라스트 뱀파이어’(2009)11 론 체니 주연의 ‘ 하우스 오브 드라큘라’(1945)

날카로운 송곳니가 사라졌다. 여자들의 하얀 목을 함부로 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뱀파이어는 다시 대중문화의 한가운데에 섰다. 지난해 출판·영화 통틀어 미국 대중문화에 돌풍을 일으켰던 ‘트와일라잇’과 2008년 최고의 영화로 평단의 지지를 얻은 ‘렛미인’에서부터 국내로 이어지는 ‘뱀파이어 트렌드’다.

21세기 뱀파이어의 진화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부터 인간 세상에 뿌리내려 온 이 흡혈인간들은 공포와 동경의 대상으로 우리 곁에 수세기를 살아왔다. 21세기 화면 속에 등장한 뱀파이어들은 그 수백 년간의 진화 방향을 뚜렷이 드러낸다. 인간의 고뇌와 욕망을 끌어안고 그들과의 공존을 고민하는 것이 핵심이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초월적 능력의 존재’로서 뱀파이어의 매력은 현재에도 여전하다. 여자친구를 끌어안고 숲 속을 유영하는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나 신부의 품에 안겨 옥상 위를 휘휘 젓는 김옥빈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쾌감은 어둠의 무거움을 뚫는 탁 트인 해방감을 안긴다.

마주 선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과 동시에 다가오는 흡혈의 욕구, 전염성을 가지는 흡혈귀의 본성이 자아내는 서스펜스 역시 뱀파이어의 본질적 매력을 뿜어 낸다. 창백한 빛의 에드워드가 벨라를 처음 보았을 때 망설이는 눈빛은 관객을 설레게 하고, 인간으로서 죽어 가는 김옥빈을 살려 내기 위해 그의 살을 물어뜯을 것인지를 놓고 갈등하는 ‘박쥐’의 장면은 폭발하는 긴장감으로 빛을 발한다.

이성과 합리를 넘어선 광기의 존재를 대변했던 뱀파이어의 역사적인 전형은 더 이상 찾기 힘들다. 그들은 인간 세상의 벽 바깥의 외부자적 존재를 거부하고, 자신의 딜레마를 안고 인간과 세상을 공유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애쓴다. 흡혈 방법부터 달라졌다. 여성의 목을 물어뜯는 장면으로 은유됐던 섹슈얼리티는 걷혔다. 영화 ‘렛미인’의 소녀 뱀파이어는 자기 대신 사람을 죽여 피를 짜 내 주는 인간 아버지에게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는다.

수혈로 흡혈인으로 변신한 송강호는 의식 불명환자의 혈관에 꽂힌 튜브를 쪽쪽 빠는 걸로 피를 보충한다. ‘트와일라잇’의 주인공들은 아예 인간의 피를 먹지 않고 동물의 피로 대신한다. 그들 세계의 ‘채식주의’를 택한 것이다. 미국 방송 HBO의 히트작 드라마 시리즈 ‘트루 블러드’에서는 일본에서 인공 피 음료가 개발되어 그것만 마시면 되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흡혈은 그저 생존의 문제로만 비친다.

대신 그들은 인간의 삶 속으로 바싹 다가서서 그들의 고민을 나눠 가진다. 흡혈이라는 여전한 존재의 딜레마가 겹쳐져 고민의 울림은 더 크게 다가온다.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는 학교에서 만난 여자친구 앞에서 먹잇감에 대한 식욕과 더불어 분출하는 사춘기의 성호르몬을 억제해야 한다. 또 교제를 반대하는 인간과 뱀파이어 양쪽 부모를 설득해야 하고 그들을 괴롭히는 깡패(흡혈귀)들을 물리쳐야 한다. 하이틴 로맨스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온 이 영화는 여느 청춘 멜로물을 벗어나지 않는 그 또래의 고민을 반복한다.

‘렛미인’의 열두 살 소녀 뱀파이어는 친구들에게 만날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외로운 소년의 친구가 된다. 초대받지 않으면 인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을 그와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으로 조금씩 용기를 얻어 가며 사랑의 감정을 느끼던 소년이 자신을 집 안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때, 놀랍게도 소녀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절망스러운 고독을 시위한다. 서로 외로움을 거울처럼 비춰 가며 친구가 됐던 소년과 소녀는 그러나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이치를 깨달으며 헤어짐으로써 성장한다.

‘박쥐’의 고민은 더 근본적이다. 흡혈귀를 퇴치해야 하는 신부가 어느 날 흡혈의 본성을 가지게 됨으로써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끼게 된다. 욕망의 크기는 점점 커져 가고 신부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살인과 간음 같은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조용한 내면을 가진 수도자에서 억제할 수 없는 본능만을 가진 동물적인 존재로 변해 버린 그는 결국 파멸의 바다로 나아가 종말을 맞는다. 선택할 수 없는 악의 본능 앞에서 무너져 가면서 끝없이 회의하고 갈등하며 구원을 찾지만 그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의 본원적인 고민이 화면 속에 낭자한 핏물만큼 진하게 전해져 온다.

전지현이 뱀파이어 헌터로 출연하는 영화 ‘블러드:더 라스트 뱀파이어’의 원작소설에서 오시이 마모루는 뱀파이어의 존재를 통해 인간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기원을 따져 올라가 보면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가 아니며 생존을 위하여 다른 생물들을 죽인다는 의미에서 뱀파이어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뱀파이어가 오랜 세월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사람의 생명을 뺏어 가는 위험한 존재이면서도 인간과 똑같은 외모를 가졌을 뿐 아니라 내면의 고민 역시 닮았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에서의 생명력 역시 공포영화에서 시작했지만 액션·코미디·멜로·성장 드라마 등으로 다양하게 장르를 바꿔 가며 변주해 낼 수 있는 그 유연성으로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계속해 부활할 수 있었다. 추방된 신에서 인간의 연인으로 대중문화 속에서 진화해 온 뱀파이어는 영원히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불멸의 존재로서 생명을 거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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