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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문학으로 구원 받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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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보면 직업이 드러나고 목소리엔 성격이 묻어난다. 물론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도 자주 있다. 그러나 한국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는 서지문(61)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의 경우엔 딱 들어맞았다. 안경 너머 하얀 얼굴은 책에 묻혀 세월을 잊은 듯 젊다.

서지문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한국문학 세계에 알리는 대표 번역가

가늘지만 조근조근한 목소리는 토씨 하나 놓치지 않을 듯 섬세하다. 하지만 날카롭고 거침 없이 강렬하다는 느낌을 주었던 신문 칼럼을 생각하면 또 대조적인 인상이었다.“무슨 형벌 같고 죄 닦음 같아요. 영어 좀 안 하고 살면 안 돼요? 할 사람만 하고 말이에요.” 영어공부의 길을 묻자마자 안타까움을 먼저 드러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영어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할까요? 참 속상해요.”서 교수의 첫 문학 번역작품 ‘The Rainy Spell and Other Korean Stories’는 1983년 미국 출판사를 통해 출간했다. 윤흥길의 ‘장마’를 비롯해 한국 단편소설 14편이 실린 이 작품은 미국의 여러 대학이 한국문학 수업교재로 사용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이문열의 ‘금시조’ 등 20편 넘는 한국 소설을 영어로 옮겼고 2002년에는 100편이 넘는 한국전쟁 시를 모아 ‘Brother Enemy’를 출간했다. 이문열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는 지금 출간을 기다린다. 1984년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는 대한민국문학상, 2000년에는 한국 PEN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박혜주 한국문학번역원 교육연구실장은 한국 문학작품이 본격적으로 외국에 소개되기 시작하기는 1950년대부터라고 말했다. 당시 대표적 번역가는 피터 리 UCLA 한국문학 교수, 평화봉사단으로 인연을 맺은 데이비드 매켄 하버드대 동아시아과 교수였다.

1980년대에 가서야 국가가 관심을 갖고 지원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서 교수를 비롯해 전경자 가톨릭대 교수, 케빈 오룩 신부(경희대 교수), 이성일 연세대 교수 같은 2세대 번역가들이 등장했다. 뒤의 두 사람이 한국 시 전문이라면 앞선 두 사람은 소설 분야의 대표적 번역가다.

영어를 잘하게 된 비결을 물었더니 수줍게 웃는다. “솔직히 대학은 그냥 갔어요. 아무 재주가 없으니까 어머니가 시집이나 잘 가라시더군요.” 1965년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문학을 아주 좋아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요.”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 마치 접신하듯 영문학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그랬을까 싶어요. 매일 12시간 300쪽씩 읽었어요.” 두 달 동안 거의 30권을 봤다. 가벼운 책은 하루에 한 권, 쪽수가 적으면 두 권도 읽었다. 500쪽에서 900쪽에 달하는 19세기 명작들은 2~3일에 해치웠다. “법문사 같은 데 가면 문고본들이 35센트, 50센트 그랬어요. 근데 한국어 번역서는 2000원이에요. 영어책이 훨씬 쌌어요.”

“그걸 다 제대로 이해했겠어요?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냥 꿀꺽꿀꺽 삼키면서 읽었지요. 한번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는데 거기에 ‘대심문관’이라는 사람이 나와요. 그 사람이 작가의 뜻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릇된 사고의 전형으로 작가가 내세운 인물이더라고요. 우습죠? 하지만 별로 신경 안 썼어요. 잘못 이해하면 잘못 이해하는 대로 그냥 감격해서 읽었죠.”

사전을 일일이 찾아봤다면 도저히 소화하기 힘든 독서량이었다. 젊고 어린 나이 덕분에 어림짐작도 싱싱했나 보다고 웃으며 말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온다고 조바심 내지 않았어요. 그냥 읽었죠. 앞뒤 연결 때문에 꼭 알아야지 싶어야만 사전을 찾았어요.” 그러나 서 교수는 권장할 만한지 모르겠다며 겸손해 했다.

그러다 선교사로 이화여대 영문과에 교수로 재직했던 캐슬린 크레인을 만났다. “오드리 헵번보다 더 예쁜 미인이셨는데 얼마나 재치가 있으셨는지. 스물네 살부터 일생을 남의 나라에 와서 봉사한다고 하면 굉장히 비장하고 엄숙할 것 같잖아요? 근데 어찌나 명랑하셨는지 몰라요. 제 우상이셨어요.”

크레인 선생님에게 영작문과 창작을 배우고 4학년에 가서는 영자신문도 함께 만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코리아헤럴드에 잠시 다니다 유학을 갔다. 장학금 때문에 미국으로 갔고 웨스트조지아대학에서 석사, 뉴욕주립대학(SUNY Albany)에서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박사를 받았다. 영어 학습 요령을 묻자 서 교수는 요령부득을 얘기한다.

“그냥 미련하게 많이 읽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비결이라고 말씀드릴 만한 게 없어요.” 하지만 후회되는 일은 하나 있다. “일기를 썼으면 아주 좋았을 걸 그랬어요. 영어로든 한글로든 말이에요. 글쓰기에 아주 큰 도움이 됐을 거예요.” 대신 서 교수는 78년에 박사를 마치고 와서 코리아타임즈에 2년 동안 매주 칼럼을 썼다.

칼럼은 부정기 기고문들과 함께 1988년에 ‘Faces in the Well’이란 책으로 묶여졌다. 서 교수는 “영어와 문학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만약 그 둘이 없었다면 남들처럼 결혼해서 아이 낳고 키우고 그랬겠죠.” 흔한 질문을 던졌다. “옮기기 고생스러웠던 작품이오? 전부 다 힘들었죠. 첫 작품은 타이프라이터로 6번까지 새로 쳤어요. 그때 컴퓨터가 있어요? 치고 나서 연필로 수정하고 또 한 번 치고, 한 달 후에 보면 또 눈에 거슬리고, 그래서 고치고 또 치고.”

서 교수는 영어번역이란 아무리 해도 완벽하기는 힘들지만 무한대의 노력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화가 다른 두 언어를 교통시키기는 어렵다. 풍습이 다르고 관념이 다르니 한쪽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저쪽에서는 비정상이 돼버리기 쉽다.

“우리말은 영어에 비해 논리가 좀 철저하지 못한 편이에요. 또 정서의 차이 때문에 힘든 경우도 많죠. 예를 들어 주인공 청년이 친척 누나와 술잔을 나누며 신세한탄을 하다가 같이 쓰러져 잤다고 하면 서구의 독자들은 100% 근친상간을 떠올려요. 또 선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자기 일까지 포기하며 애를 쓰는 후배 이야기를 보면 바보스럽다거나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이런 것들이 번역자를 잠 못 이루게 하는 부분이에요.”

옛 관직이나 전통의례, 농사 등과 관련된 용어들을 만나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야 할 때도 적지 않다. 읽기보다 말하기가 강조되는 요즘 영문과 교육이 제 길을 잘 가는지 묻는 사람이 많다. “네, 고민이 많아요. 모순도 있어요. 영문과는 문학을 강의하는 학과잖아요. 교수들은 다 문학학위를 받았는데 학생들은 문학보다 영어 좀 배워서 일반회사에 가서 써보려고 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영문과가 어학강좌처럼 나갈 수는 없잖아요? 오히려 문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게 가장 확실하고 풍부한 영어를 구사하는 길이에요.”

1978년 서른 살의 나이로 처음 교단에 선 이래 영미문학과 영어산문을 강의해 왔다. 학생들은 소설을 더 좋아하지만 서 교수는 토머스 모어 등 영국 사상가들의 깊은 사색이 담긴 산문에 애정이 더 간다. “영문과에서 산문을 강의하는 사람은 적어요. 박사 때 이런 과목을 처음 들었는데 학부에서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름대로는 학생들에게 주는 독특한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서 교수는 좌우명을 묻는 질문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에 나오는 한 구절을 적어줬다. “It would be a blessing if the doctrine of necessity could be believed by all with respect to the characters of others, and disbelieved in regard to their own.” 자서전에서 소회를 말한 부분이라 좌우명답게 깔끔하지는 못하다며 뜻을 풀이해줬다. “남들의 성격이나 행동은 결정론(숙명론)적으로, 그러니까 그 사람의 출생과 성장배경과 상황 탓이라고 너그럽게 봐주고 자신의 행동이나 인격은 자유의지로 성립된다고 생각하고 엄격하게 평가하라는 뜻이에요.”

그녀가 말하는 ‘영어 잘하는 노하우’

1. 많이 읽자
독서는 저수지다. 밑천을 쌓는 일이다. 문학작품은 성찰의 깊이도 더해 주니 일석이조. 감명 깊었던 영화대본을 봐도 좋다. 유학시절 바쁜 와중에도 뉴스위크와 타임을 탐독했다. 다채로운 정보가 대화의 소재도 되고 머리도 식혀줬다.

2. 일기를 쓰자
학교 다닐 때 일기를 쓰지 않아 많이 후회한다. 영어든 한글이든 일기는 무조건 적극 권장한다. 쓰고 나서는 원어민이나 영어를 잘하는 사람의 검토를 받고 틀린 걸 꼭 다시 써보도록.

3. 상상 속 대화를 즐기자
외국인 친구가 옆에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좋아하는 사람과 어떤 주제를 두고 영어로 대화나 토론을 한다고 상상하자. 머릿속으로 대본을 써가며 이리저리 영어 문장을 자꾸 만들어보고 떠오르지 않는 영어단어는 나중에 찾아서 보충한다.

4. 그리고 좀 뻔뻔해지자
유학시절 전화가 무서웠다. 수업발표는 칭찬을 들어도 일상대화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완벽한 영어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나이 먹은 뻔뻔함이 그때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문장에 신경 쓰지 말고 뻔뻔하게 말하라. 하지만 되도록 올바른 영어를 쓰려는 노력도 잊지는 말자.

■ 기억에 남는 번역 문장- 황순원의 ‘곡예사’ 중에서

작품의 거의 마지막 구절로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어렵게 구한 셋방에서 어린 자녀들이 주인집 눈치를 보느라 노래도 못 부르고 숨 죽이며 살다가 밤중에 길거리에서 엄마, 아빠와 같이 귀가하다가 노래 부르고 춤추는 아들딸들을 보면서 아빠가 하는 서글픈 독백이에요”라고 서 교수는 말했다.

“피에로 동아가 쏘렌토를 부른다. 그래 마음대로 너희의 재주를 피워 보아라. 나는 너희가 이후에 오늘의 이 곡예를 돌이켜보고, 슬퍼할는지 웃음으로 돌려버릴는지 어쩔는지 그건 모른다. 따라서 너희도 이날의 너희 엄마 아빠가 너희들의 곡예를 보고 웃었는지 울었는지 어쨌는지를 몰라도 좋은 것이다. 그저 원컨대 나의 어린 피에로들이여, 너희가 이후에 각각 자기의 곡예단을 가지게 될 적에는 모쪼록 너희들의 어린 피에로들과 더불어 이런 무대와 곡예를 되풀이하지 말기를 바란다.”

“Pierrot Tong-a began to sing "Sorrento." Yes, show off all your accomplishments. I do not know whether, when you look back on today's circus performance many years later, you will grieve or laugh over it. And you, also, do not have to know whether your father and mother witnessed your circus acts today with tears or with laughter. I only wish, my dear little pierrots, that when each of you has his own circus troupe, you will not have to repeat this kind of circus on this kind of stage with your young pierrots.”

■ 영어의 달인 서지문 교수가 뽑은 영미문학의 진수

문학의 깊이에 빠져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초중급 수준에 맞는 영미문학의 대표작들을 골라 뽑았다. 여기에 보너스 하나 더!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영화와 드라마로 많이 제작됐는데 가장 원작에 충실했던 영화 1편, TV드라마 1편도 함께 소개한다.

<초급 도서>

1. Love and Freindship(제인 오스틴, ‘사랑과 우정’. 15세 때 쓴 소설로 책 제목의 철자도 틀렸다.)
2. A Christmas Carol(찰스 디킨스, ‘크리스마스 캐럴’)
3. The Autobiography of Benjamin Franklin(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

<중급 도서>

1. Pride and Prejudice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2. A Scarlet Letter (너대니엘 호손, ‘주홍글씨’)
3. A Room of One's Own (버지니아 울프, ‘나만의 방’)

<고급 도서>

1. Moby Dick(허먼 멜빌, ‘백경’)
2. Middlemarch(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3. King Lear(셰익스피어, ‘리어왕’)

<영화&드라마!>

1. ‘Emma(엠마)’
역시 제인 오스틴의 작품. 영화로, TV드라마로 여러 번 제작됐다. 하지만 원작의 묘미를 가장 잘 살렸다고 서 교수가 추천한 작품은 케이트 베킨세일과 마크 스트롱이 주연한 1996년 영국 TV드라마 버전이다. 제인 역을 맡은 올리비아 윌리엄스의 연기가 좋다고.

2. ‘Sense and Sensibility(센스 앤 센서빌리티)’
명배우 에마 톰슨이 주연한 영화 ‘센스 앤 센서빌리티’도 영어의 진수를 맛보게 해주는 수작.

달인의 칭찬 릴레이

영화감독 김홍준. 웬만하면 영문과 교수를 피해야겠다면서 김 감독을 추천했다. ‘혼불’을 쓴 고 최명희 작가가 시카고대학에서 열린 한국문화세미나에서 김홍준 감독의 발표를 보고 영어실력을 극찬했다고 한다.

이정명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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