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로는 여기다]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재미' 찾으면 그게 바로 활로

중앙일보

입력 1998.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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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한방 얻어맞은 거지.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지 않아. 잘 될 거야. ”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지만 요즘처럼 가슴 속을 몰아치는 바람이 한없이 맵게만 느껴지면 이런 말조차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비디오 아트로 세계적 명성을 쌓은 백남준 (白南準.66) 씨는 한국의 젊은 후배 예술가들에게 우선 이런 따뜻한 말을 건넸다.

“그건 지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어. 우리 나라 왼쪽에 도쿄가 있고 오른쪽에는 상하이가 있지. 그리고 밑으로는 싱가포르가 있는데 모두가 최첨단 소비도시로 자원은 하나도 없는 데지. 우리는 그 한가운데 있는 거야. 그런데 위에 있는 만주하고 시베리아는 자원이 무진장해. 도쿄나 상하이에서 이 자원을 가져가려면 우리를 거쳐가지 않을 수 없어. 지금은 어렵다고 해도 먹고 살 길은 열려 있는 셈이야. 그래서 길게 봐서 나는 낙관적이야. ” 백남준씨는 3년전 갑작스레 닥친 뇌졸중으로 마이애미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놓고 겨울철은 요양을 겸해 그곳에서 보내고 있다.

그곳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백씨는 우선 'IMF구제금융' '정리해고' 같은 말에 덩달아 주눅들어 가슴 썰렁하게 지내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걱정하지 말라' 는 메시지를 전했다.

예술은 원래 그런 것과 무관한 것이란 뜻이다.

“예술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야. 수단이 아니지. 말하자면 애초부터 주식값 하고는 무관한 거야.” 힘든 시간이 기다리는 예술가들에게 활로가 될만한 무엇이 없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그런 것은 없다' 고 말했다.

대신 재미를 찾으라고 권했다.

“내가 미디어 아트 한다고 했을 때 뭐가 있어서 했나. 그냥 재미있어서 한 거지. ” 예술가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일, 좋아하는 일에 미쳐야 한다는 초보적인 원론을 다시 꺼냈다.

몰두하면 저절로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줄 수도 있다' 고 그는 덧붙였다.

“IMF 빚갚는 것은 5년, 길어도 10년이면 끝날 거야. 예술은 그런 것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 예술이 상대하는 것은 영원이야. ” 과거의 예술가들은 붓 하나로 버틴 적도 있었는데 요즘은 정보가 무궁무진한 컴퓨터 미디어가 있으니 “할 일은 얼마든지 있을 것” 이라고 했다.

근래 백남준씨는 비디오 아트에서 레이저아트로 관심을 옮겼다.

새 작업구상이 완료되면 2001년부터 서울과 평양 그리고 상하이와 도쿄를 순회하는 대형 전시를 펼칠 계획이다.

그래서 건강에 많은 신경을 쓰며 매일 1백50m씩 걷는 운동을 하고 있다.

또 자신은 80살까지는 죽을 수가 없다고 했다.

백씨가 80살이 되면 작고한 그의 친구 존 케이지가 태어난지 1백년이 되는데 뉴욕 카네기홀에서 그의 추모 쇼를 벌여주겠다고 한 약속 때문에 결코 그 이전에 세상을 뜰 수 없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괜찮다' 고 하는 그의 말 속에는 멀리 내다보고 힘차게 걸어가면 발밑의 작은 돌부리나 함정 따위는 저절로 넘어서게 될 것이란 의미가 담겨있는 듯했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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