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포커스] 충무공 옛집의 비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월간중앙

관련사진

photo

유학을 상징하는 매화가 한때 문신을 꿈꾸었던 충무공 옛집 앞에 핀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순신의 호(號)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뜻밖에 별로 없다. 소설 <임진왜란>을 쓴 김성한은 그의 호가 ‘덕곡(德谷)’이라고 했다. 대개 이 호가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이순신 호는 '백암'
데릴사위로 산 처갓집 마을 명칭에서 따 장인이 충무공에게 무과시험 보도록 권유
임란 영웅 만든 셈
거북선 상상력은 유학+병법 고루 갖춘 ‘인문학 장군’의 파워
신임 장군 콧대 누른 부인의 위엄 서린 곳... 제사 보름 뒤 경매로

그런데 충무공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순신세가>(전6권, 저자 김기환)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꽤 있다. 사실(史實)과 다른 점도 없지 않아 모두 믿기 어렵지만, 도저히 창작할 수 없는 내용도 있어 참고사료로 쓸 만하다.

특히 이 책은 충무공의 호가 어린 시절 서울에 살 때는 ‘기계(器溪)’였고, 아산에 와서는 ‘백암(白巖)’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백암은 이번에 경매에 부쳐진 충무공 옛집 부지가 있는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옛집의 주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100번지다. ‘염치(鹽峙)’는 소금언덕이라는 뜻이고, 백암(白巖)은 흰 바위라는 뜻이니 지형적 특징을 말해주는 듯하다.

충무공이 고향도 아닌 이곳을 자신의 호로 쓸 만큼 자신과 동일시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백암리 집 땅이 넘어갈 위기에 처한 것을 충무공이 알았다면 ‘백암’ 자신이 넘어가는 만큼의 충격일 것이다.

명궁과 명궁이 만나다

충무공 옛집은 이순신의 외갓집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종가 사람들은 이순신의 부인인 상주 방씨 집이라고 한다. 이순신은 이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임진왜란에 출전하기 전까지 거주한다. 충무공의 외갓집 또한 아산의 같은 마을에 있었다. 서울의 건천동(현재의 명보극장 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일찌감치 아산 외갓집에서 살게 된다.

<이순신세가>에는 19세 때 금강산에 공부하러 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곳에서 한 도인을 만나 ‘문(文)을 놓고 무(武)를 배우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즉 그는 북두칠성의 둘째 별인 하괴성(河魁星)의 정기를 타고나 장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가 결혼하는 해는 2년 뒤인 1565년이다.

예언이 맞으려고 그랬는지,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方震)을 만나게 된다. 후손들은 이순신이 서울에서 한문 선생을 했던 기록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14세 무렵 아이들에게 <자치통감>을 가르쳤는데,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 이 모습을 우연히 보고 방진에게 이순신을 소개했다고 한다.

이준경 또한 1555년 전라도 도순찰사로 있을 때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니, 이순신의 됨됨이를 일찍 알아보는 눈을 가졌을 만하다. 그런데 방진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충무공 전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활을 잘 쏘았던 방진의 집에 어느 날 도적떼가 들었다.

안마당으로 달려드는 도적을 향해 활을 쏘려 하자 화살이 없었다. 도적들과 내통한 계집종들이 화살통을 다 치워버린 것이었다. 그때 그의 부인이 다락에 올라가 베 짜는 데 쓰는 대나무 다발을 던지면서 큰 소리로 “화살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도적들은 깜짝 놀라 도망쳤다.

관련사진

photo

거북선 모형. 이순신이 거북선을 창안한 것은 그가 인문학의 폭발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과장이나 창작의 혐의가 없지 않지만 방진이 굉장한 활잡이였음을 웅변하는 고사다. 이순신의 운명이 바뀌는 것은 이 뛰어난 무예를 갖춘 장인을 만나면서다. 이순신 또한 어린 시절 서울에 살 때 활에 매료된 소년이었다.

유성룡의 증언이 있다. <징비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순신은 어릴 때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 때도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거리에서 놀았는데, 그 마음을 거스르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아이들의 군문(軍門) 앞을 함부로 지나지 못하였다.”

이랬던 소년이니, 도적을 화살도 없이 쫓아 보낸 명궁(名弓)에 반했을 것이다. 방진은 문과 준비를 하는 사위에게 “자네는 기골이 장대하니 무과로 바꿔보는 것이 어떻겠나” 하고 권유했다. 이순신은 금강산에서 들었던 도인의 하괴성 예언이 머리에 떠올랐을 것이다.

고택 앞에 있는 사대(射臺)에서 활을 쏘며(당시 과녁판은 200m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145m로 들어와 있다.) 무인이 되기로 결심을 굳힌다. 그가 무과에 합격한 것은 32세 때이며 결혼한 지 11년 만이다. 왜란을 맞아 해전에서 그토록 혁혁한 공을 세운 충무공의 능력과 견문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미스터리에 가깝다.

전쟁 이전에는 바다싸움을 실습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그가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무공을 세운 것은 천재성에 바탕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무예에 출중했던 방씨 가문에 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바로 백암리의 옛집에서 그 발상의 대전환이 이뤄졌던 셈이다.

인문 콘텐츠, 거북선과 매화 두 그루

30대까지 문신 지망 유학자였던 그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면 고택 앞에 나란히 피어 있는 홍매·백매 두 그루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 매화는 주자 이래 유학자들의 인고(忍苦)와 절개를 상징하는 최고의 화두였다. 무골(武骨)이지만(부친 이정(李貞)도 병절교위라는 종6품 무관을 지냈다) 충무공은 요즘으로 말하면 인문학적 베이스를 갖춘 영웅이었다.

유학자로서 터득한 문·사·철(文史哲)의 통찰 능력이 거북선을 재창조하는 저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귀선도설(龜船圖說)을 참고해 그가 거북선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을 때 거의 모든 부하가 반대했다고 한다. 부관 김운규는 좌수사가 철없이 우스꽝스러운 짓을 한다고 비판했다. 다만 이순신을 가까이에서 모신 송희립과 녹도만호 정운이 그를 지지했다.

이후 이 병선(兵船)이 승승장구의 위력을 떨치면서 ‘거북’이라는 아이콘은 적에는 공포의 대상, 아군에는 용기와 자신감의 상징이 되었다. 거북은 죽지 않는다. 장수(長壽)의 캐릭터를 과감히 채택해 전투력에 활용한 그 힘. 그것은 바로 옛집 앞에 핀 매화 두 그루의 인문학 정신에서 나온 것 아닐까?

고즈넉한 백암리가 개발공사로 떠들썩해진 것은 1967년이다. 군부정권의 당위성과 이념적 상징을 모색하던 박정희 정권은 충무공에 마음이 꽂혔다. 현충사를 거대하게 짓고 그 아래 후손들의 마을을 정비해 한쪽으로 몰아낸 것은 구국의 영웅을 대접하기 위한 나름의 배려 방식이었다.

고택은 객처럼 현충사 귀퉁이에

관련사진

photo

인간 이순신의 체취를 느끼려면 옛집 마당을 거닐어보라.
고즈넉하지만 카랑카랑한 기개가 서려 있던 옛집은 다시 지은 현충사의 기세에 눌려 귀퉁이에 손님처럼 앉아있다. 생활을 위한 집이라기보다 장군의 위엄을 돋우기 위한 전시용 집처럼 되어버렸다.

행랑채가 없어지고 사랑채가 커진 것이 그런 느낌을 돋운다. 현충사를 확장한 뒤 잠시 그곳에서 거주하던 충무공 종가도 이웃 마을로 거주지를 옮긴다. 이후 이곳은 관광객이 한 번씩 둘러보는 ‘관람용 집’이 되었다.

현충사는 죽음을 기리는 집이며, 옛집은 그의 삶을 되새기는 집이다. 사당에는 실제 신체 사이즈보다 조금 큰(193X113cm) 영정(이당 김은호 화백 그림)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앉아있고, 옛집에는 사방의 툇마루마다 봄 햇살이 그저 따뜻하게 떨어질 뿐이다.

인간 이순신을 느끼려면 오히려 빈 집의 호젓한 마당을 거니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또 이곳은 충무공 영령과 후손들이 해마다 회동하는 집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충무공과 정경부인 상주 방씨의 불천위제(나라에 공로가 큰 분에 대해 위패를 옮기지 않고 제사를 계속 지내는 일)를 지낸다.

이곳에서는 후손들이 충무공뿐 아니라 상주 방씨 조상의 제사도 함께 지내는데, 충무공 정경부인이 무남독녀 외동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숨지던 1598년만 해도 이 집은 결코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잠긴 백암리의 상주 방씨에게 한 무리의 손님이 찾아왔다.

삼현육각(三絃六角, 현악기와 관악기로 편성된 악대)으로 화려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마을로 들어왔다. 말을 타고 옛집 앞에 선 사람은 충무공 사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부하 이운룡이었다. 이운룡은 상주 방씨를 찾아 뵙고 부임을 아뢰며 예단을 내놓았다. 그러자 방씨는 나직이 말하였다.

“돌아가신 옛 상관의 집에 찾아오는 예를 갖추지 못하셨습니다. 예물은 받지 않겠으니 가지고 돌아가소서.”

이 말에 이운룡은 한동안 쩔쩔매며 무례를 사과했다. 한참후에야 부인은 노기를 풀었다고 한다. 지난 3월11일(음력 2월15일)은 저 쩌렁쩌렁하던 정경부인 상주 방씨의 기제사였다. 봄날 밤 자정에 현충사 경내 고택 마당에서 빠르고도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공기가 사각대는 소리가 난다.

마당에서는 혼을 불러들이는 장작불이 피어 오르고, 안채 부엌 가마솥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솟는다. 옥색과 흰색의 도포를 차려 입은 제관 수십 명이 사랑채에서 나온다. 안채 대청마루에는 이순신 장군이 명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병풍이 쳐져 있다. 제주는 등롱을 든 제관들을 앞세우고 사당으로 가서 제사에 모실 위패를 가져온다.

“영이 현십오대조비 정경부인….”

제관이 위패를 모셔감을 알린다. 이윽고 교의에 위패가 도착하면 항렬에 따라 늘어선 제관들의 절이 이어진다. 매화는 보름달을 받으며 꽃망울을 물고 있고, 고택 마루에서는 제관들의 오가는 발길에 삐걱대는 소리가 적막을 깨뜨리며 묘한 긴장감을 부른다. 종갓집 둘째아들인 재엽 씨가 죽기 전에는 그가 종손 대리를 했다.

그가 제주였다. 지난해 그마저 사망하자 종친회 회장(이재왕)이 제주가 되었다. 그날 이후 보름도 지나기 전인 3월25일에는 이 집의 땅이 경매에 들어갔다는 신문 보도가 났다. 또 4월28일은 충무공 탄신제가 있는 날이다.

백암리를 수백 년 동안 지킨 백암이 자신의 터전이 법정에 올라간 사태를 어떻게 생각할까? 염치읍에서 2009년 봄을 서성거리는 충무공의 후예들은 성인 반열에 올라 유일하게 탄신제를 모시는 조상에게 몹시 염치가 없는 4월이 됐다. 상주 방씨의 낮은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하다.

“예를 갖추지 못하였으니….”

글■이향상 자유기고가 [isomis@naver.com]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