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서른다섯번의 봄이 오갔다 그대로인 것은 사람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천양희 ‘물에게 길을 묻다 3’ 중)

사람같이 산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신경림 시인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농무’ 중)고 노래한 시집 『농무』가 나온 게 1975년이다. 『농무』에서 시작된 ‘창비 시선(創批 詩選)’이 막 300호를 채웠다.


민중의 애환을 쉬운 말로 그린 시는 위험했다. 1970~80년대 창비시선은 곤욕을 치렀다. 조태일의 『국토』, 황명걸의 『한국의 아이』, 양성우의 『북 치는 앉은뱅이』, 이종욱의 『꽃샘추위』 등이 판매금지됐다.

창비시선은 이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리얼리즘의 꽃’이요, 소박하게 말하자면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300호 기념시선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의 주제는 ‘사람과 삶’이다.

박형준·이장욱 시인이 201호~299호까지 시집을 펴낸 86명 시인들 작품에서 주제에 들어맞는 시를 한편씩 골라 묶었다. 201호 이후 최근 10년은 시인들이 창비시선과 반대편에 서 있다는 ‘문지시선(文知詩選)’을 오가며 시집을 낼 정도로 시선의 구분이 모호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박형준 시인은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시가 변해도 ‘진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란 변하지 않는 정서가 있었다”고 말했다.

“십이마넌인데 십마넌만 내세유, 해서 그래두 되까유 하며 지갑들 뒤지다 결국 오마넌은 외상을 달아놓고, 그래도 딱 한잔만 더, 하고 검지를 세워 흔들며 포장마차로 소매를 서로 끄는 봄밤이다.”(김사인 ‘봄밤’ 중)

창비는 300호를 기념해 이시영 『만월』,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김정환 『지울 수 없는 노래』, 고은 『조국의 별』, 김용택 『섬진강』,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안도현 『그리운 여우』,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 김선우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문태준 『맨발』, 신용목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등 자필사인본 36선을 판매한다. “이래저래 한 오마넌은 더 있어야 쓰겠는” 봄날이다.

이경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