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대통령선거를 하루 앞둔 17일 중앙일보는 분단 52년만에 처음으로 북한 문화유산을 취재하기 위한 방북 (訪北) 조사단이 북경을 거쳐 평양으로 떠났다는 기사를 1면 머리로 보도했다.
이와 함께 지난 9월23일부터 10월4일까지 실무협의 및 예비조사차 북한을 다녀온 유홍준 (兪弘濬) 영남대박물관장의 '방북인상기' 를 실었다.
분단 이후 첫 남북 학술교류가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뉴스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兪교수의 '방북인상기' 는 독자들에게 문자 그대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집필자 兪교수는 해방이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살아 숨쉬는 국토박물관' 이라고까지 불리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3권) 바로 그 저자였기 때문이다.
새해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되는 兪교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에 앞서 이번 '방북인상기' 에서 못다한 말,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내용 등을 미리 들어봤다.
먼저 兪교수는 신문에 나간 '개인사정으로 2차 방북조사단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다' 는 점에 대해 해명하고 싶어했다.
그는 "꼭 개인 사정만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학기에 성균관대대학원에서 박사학위논문 심사를 받아야 했다" 는 점을 강조했다.
지도교수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어 더 이상 기회를 미룰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매우 까다로운 과정을 무난히 통과했다" 며 '문화유산답사 박사' 라는 칭호 이외에 그의 전공인 예술철학으로 정식 박사학위를 받게 됐다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 북한에서 兪교수의 학위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는가.
“박사냐, 준박사 (準博士) 냐고 물었다.
북한은 직급을 매우 중요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준박사라고 대답했다.
준박사는 우리의 석사급이지만 그보다는 한단계 위라는 인상을 받았다.”
- 이번 '방북인상기' 는 학술적 측면에서 남한학자의 첫 인상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 '인상기' 에서도 일부 밝혔지만 남북학술교류의 첫 테이프를 내가 끊었다는 점에서 책임이 무거웠다. 그런 탓에 글 쓰기가 매우 어려웠다. 수차례 글을 다듬었다.
공신력 있는 언론기관과 함께 갔다 왔다는 점에서 기존의 어떤 글과도 차원이 달라야 한다는 중압감에 고생 좀 했다. ”
- 새해부터 연재될 '북한답사기' 의 내용에 대해 독자들이 매우 궁금해 할텐데.
“정직하게 쓰려고 한다. 본대로 느낀대로 쓸 것이다. 문제는 글맛이 살아나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제대로 될까 걱정이다.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도 중요하지만 문화유산과 더불어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나오는 끈끈한 살냄새가 배어있어야 글읽는 맛이 나게 마련인데 - .예컨대 남한의 답사기에서는 지나가는 길목의 가겟집 아주머니의 인상을 통해 사람 사는 냄새를 그려낼 수 있었다.
또 상징적인 언어를 통해 의미 전달을 보다 리얼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생략이나 상징적 언어를 동원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자칫하면 독자들이 필요 이상의 과장된 상상을 할 것이고 오해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제한된 지면에 어떻게 앞뒤 설명 없이 압축된 언어를 통해 느낌을 전달할 것인가는 아직도 과제로 남아있다. ”
- 남한내의 답사에서는 첫인상의 중요성을 간직하기 위해 답사대상에 대한 자료를 별로 준비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이번 북한의 경우에도 그랬는가.
“중앙일보 조사단과 공식 방북한다는 것은 최근 몇 달 사이에 외부로 알려진 것이지만, 사실은 2년전부터 준비해 왔다.
나의 전공이 한국회화사이므로 고구려의 벽화고분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여왔다.
10년전에 이태호교수 (전남대) 와 '고구려고분벽화' 라는 책을 함께 발간해 어느 정도 이해는 있었다.
여기에다 최근 국내에 소개된 '조선유적 유물도감' 20권짜리를 샅샅히 뒤져봤고 남한내에 있는 북한 문화유적관련 논문은 거의 다 읽었다.
다만 문학적인 자료만은 아직도 좀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답사기' 를 쓰기 위해서는 조사대상을 최소한 세번은 봐야 한다.
한번은 단순히 관객으로서 문화유산과 접하고, 두번째는 자료를 소화한 다음에, 그러고도 제대로 글줄을 잡기 위해서 한번 더, 이렇게 세번은 봐야 한다. ”
- 그렇다면 딱 한번 다녀와서 '북한답사기' 를 제대로 쓸 수 있겠는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답사와 관련해 이런 말이 있다.
'한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최소한 3일이나 한달, 또는 3년을 봐야 한다' 는 것이다.
나의 경우, 평양에 3일 묘향산에 3일 등 한달의 반 가량 있었다.
그런 점에서 쓸 말은 충분하다고 본다.
다만 첫 인상이었다는 점에서 주관적인 면을 얼마나 배제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2.3차 방북을 시간을 두고 가려 했던 것도 이런 점을 고려해서였다. "
- 사진첩이나 영상매체를 통해 북한문화재에 낯익은 독자들이 매우 많다.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유적을 직접 보는 것과 사진을 통해 보는 것의 차이점이 있다.
사진은 유적이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가를 다 보여주지 못한다.
또 그것의 스케일이 어느 정도인가도 짐작할 수 없다. 아마 나의 답사기는 사진으로만 보는 단점을 충분히 커버해 주리라고 자신한다.”
- 남북한의 언어 이질화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북한 학자와 함께 다니면서 용어상에 불편은 없었는가.
“고고학 분야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지난 74년 남한 고고학계에서 '한국고고학 개정용어집' 을 내면서 북한쪽 자료를 많이 참고했다.
상당 부분 접근해 있다.
그래도 가기 전에 북한측 용어를 익혔다.
함께 다닌 북한측 리정남 (李定南.조선중앙력사박물관 연구사.17일자 '방북인상기' 참조) 선생도 남한쪽 용어를 익히고 있었다.
내가 북한용어로 질문하면 리선생은 꼭 남한용어로 대답했다.
고구려 동명왕릉에서 내가 석실구조가 '돌방흙무덤이냐?' 고 하면 그는 '그렇다.
석실봉토분이다' 고 답하는 식이었다.”
- 국내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북한의 단군릉에 대해 여러가지 비판적인 견해가 없지 않다.
兪교수가 처음 실물을 본 셈인데….
“북한은 단군릉과 동명왕릉, 왕건릉 (개성 소재)에 대한 조사.복원 사업을 대대적으로 했다.
엄밀하게 말해 단군릉 그 자체는 '20세기 유물' 이라고 봐야 한다. 문제는 단군의 '뼈' 인데, 그것은 뭐라 말할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남한에서 이순신장군의 아산 현충사를 성역화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단군릉을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 지금까지 해외에서 남북한 학자들이 만난 적은 몇차례 있었지만, 직접 북한에 들어가 만난 것은 처음이다.
방북조사단은 학술분야의 남북교류라는 첫발을 옮겨놓는 큰일을 해냈다.
앞으로 남북학자들이 고고학 분야에서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에 대해 논의해 보았는가.
“가령 학술용어를 통일하기 위한 심포지엄 같은 것은 쉽게 구체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선생에게 남북학자들이 공동으로 발굴사업을 한다면 어떤 게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고구려 처녀고분' 을 들었다.
학자들끼리는 가능한 한 빨리 공동사업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기대가 역력했다.
특히 일본인들이 중심인 '고구려회' 가 개성 근처에서 발굴작업을 하기 위해 곧 북한에 들어오게 된다고 귀띔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에 앞서 남북한 학자들이 공동사업을 빨리 펼쳤으면 하고 그들도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 북한학자들과 함께 다니면서 민족동질성 같은 것을 느꼈는가.
“시쳇말로 '학삐리' (학자) 들은 아무래도 '낭만적인 분위기' 가 있게 마련이다.
묘향산 계곡에서 함께 점심을 먹거나 '결속모임' (북한은 송별연을 그렇게 불렀다)에서 술잔이 오고갈 때 끈끈한 정 같은 것을 느꼈다.
동행한 리선생은 김형수기자의 사진취재용 알루미늄 사다리를 줄곧 들고 다녔다.
무거운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들겠다고 해도 굳이 그렇게 했다.
이 점에 대해 우리측이 결속모임때 고마웠다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NHK에서 북한 유적을 촬영 왔을 때, 촬영 기자재를 우리측 동무들이 절대 들어주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유물 보호에만 신경 쓰면 된다고 지시했다.
그러나 남한의 중앙일보에서 학자와 기자들이 처음 왔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고 다녔다.
'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아, 이런 것이 핏줄이로구나' 하고 느꼈다. ”
- 북한측에서 兪교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 같은가.
“초청자인 조선 아세아태평양위원회에서 내 책을 면밀히 검토한 것 같았다.
내 글을 두고 "고색 (古色) 이 비껴가서 좋았다” 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고색' 이란 '인간에 대한 따뜻함' 그런 뜻인 것 같았다.
또 그들 말에 따르면 방북이 성사된 것은 '중앙일보가 좋은 종자를 구했기 때문' 이라고 했다.
북한은 남한의 언론에 자신들의 일부가 공개되는 것에 매우 신경 쓰고 있다.
그들은 '교수선생이 답사기를 쓴다' 고 해서 초청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
- 방북기간중에 북한 주민들과 접촉할 기회가 있었는가.
“거의 없었다. 일정 자체가 빡빡했고 이를 맞추기 위해 북한측은 '자동차 바퀴수 (거리와 시간을 뜻함) 까지 계산했다' 고 할 정도다.
그래도 살냄새를 맡기 위해 유적지에 가면 안내원의 설명은 뒷전에 두고 그의 생활상을 물었다.
결혼했는가, 애들은 몇이냐 등을 물으면 쉽게 대답해 줬다. ”
- 하루 답사가 끝나면 주로 어떻게 지냈는가.
“오락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봤다.
초대소에 준비된 오락기구는 장기와 다이아몬드 게임기 (말판놀이 기구)가 전부였다.
오랜만에 다이아몬드 게임을 실컷 즐겼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니 북한에서도 신세대 문제가 심심찮이 화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네가 피죽이라도 먹어 봤느냐" 고 하는 대화가 나온다.
아마 어느 나라든 삶의 질이 달라지면서 세대간에 간격이 생기게 마련인 것 같다. ”
- 그밖에 북한사람들의 생활상에서 특이하다고 느낀 점은.
“그들은 농담을 매우 즐기는 것 같았다.
그들끼리 '아무개 동무는 눈이 크고 둥근 것이 잘 생겼다' 고 하면 상대는 '하지만 눈이 가늘어야 예지가 빛나 보이지 않나요' 하며 서로 농을 주고받았다.
또 그들은 어디서든 시낭송을 즐겼다.
묘향산에 신혼여행 온 신랑이 즉석에서 자작시를 읊는 것도 들었다. ”
- 연재될 내용을 미리 다 빼먹을 수는 없고….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평양 갔다왔다' 고 해서 '평양' 을 많이 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가 본 것은 특수한 분야의 일부였다.
그 특수한 것이 마치 보편적인 것인 양 독자들에게 비칠까 두렵다.
나의 기존 답사기를 통해 우리 국토와 유적에 대한 애정을 깊이 느꼈듯이 북한답사기를 통해 남북한의 문화적 동질성을 확인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남북간에 신뢰성을 쌓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급적 주관적 해석은 피하려고 한다.
이 점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
- 곁가지지만, 유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로 수십억원의 인세를 받았다고 소문나 있다.
앞으로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소문은 요란하지만 실속은 그리 없다.
세금 내고 일부는 필요한 곳에 기증하고 수억원 남아 있다.
경주나 지리산 근처에 문화유산답사회관을 지을 생각이다. 강의실도 갖추고 여관업도 겸한 그런 회관을 구상중이다. ”
우리 시대의 뛰어난 재담꾼이자 '답사의 길눈이' 로 소문난 그가 의외로 말을 아꼈다.
'국민 문화교과서' 집필자로 자칭타칭 '국보' 의 위치에 오른 兪교수의 건필을 기대하며 자리를 떴다.
▶만난사람=최영주 편집위원
<유홍준 약력>유홍준>
▶1949년 서울 출생 (48세)
▶1967년 서울대문리대 미학과입학
▶1980년 서울대문리대 미학과 졸업
▶1982년 홍익대대학원 미술사학과졸업 (석사)
▶1998년 성균관대대학원 박사학위 취득예정
▶1974년 '민청학련사건' 구속, 75년 석방
▶1979년 중앙일보 계간미술 기자
▶1981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당선
▶1984년 한국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1991년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조형학부교수
▶현직 영남대학교 박물관장 문화재전문위원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주요저서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3권) '정직한 관객'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 서서' '회화의 역사' (번역서) '고구려고분벽화' (공저)